[박종면칼럼]은행장의 탄식

머니투데이 박종면 본지 대표 2017.09.18 03:57
글자크기
일전에 만난 한 은행장은 “이 자리로 오기 전에 대충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은행장이라는 자리가 정치적일 줄은 몰랐다”고 탄식했다. 그는 요즘 가능하면 외부에 나서지 않으려 애쓴다고 했고, 수익을 많이 올리는 게 부담스럽다고도 말했다.

모든 기업 CEO(최고경영자)가 그렇지만 은행 경영자도 최고의 목표는 이익을 많이 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경영전략을 짜고, 평가와 보상시스템을 만들고, 외부로 다니며 마케팅 활동을 하고, 미래를 끌어갈 인재들을 영입하고 키운다.



우리나라 은행 경영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이런 기본적인 책무보다 다른 데 더 신경 쓰고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정치적 연줄을 찾아 외부를 기웃거려야 하고, 정치인 뺨칠 정도로 정치집단화한 노조를 상대해야 한다. 여기에다 이제는 시민단체에까지 줄을 대야 한다.

문재인정부가 “적폐 청산”을 외칠 때 금융권은 이런 것들이 사라지길 기대했는데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전임 보수정권보다 더하면 더했지 별로 달라질 것 같지 않다.



금융감독원장, KDB산업은행장, 한국수출입은행장 인사는 해당 노조들이 반발하지만 정부가 인사권을 갖고 있는 만큼 낙하산 인사나 관치인사를 대입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문재인정부 출범 후 주요 민간 금융사 중 첫 번째였던 BNK금융그룹 인사에서는 문제가 있었다. 물론 BNK금융은 주가조작과 회장 구속이라는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외부 인사 영입을 자초한 측면이 있다. 또 신임 CEO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회장 선임 과정에서 B씨, J씨 등 현 정부 실세들의 이름이 끊임없이 등장했고 시민단체도 적극 개입했다.

두 번째 주요 민간 금융사 인사였던 KB금융그룹 회장 인선은 인사권을 갖고 있는 사외이사들이 선제적으로 외풍을 차단함으로써 윤종규 회장 유임으로 사실상 결론이 났지만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문재인정부는 역대 어느 정권보다 친(親)노동적이다. 그렇다 보니 경영 전반에 걸쳐 노조 개입이 심화하고 이들의 목소리가 크다. KB금융 노조는 노조선거 간섭을 빌미로 관련 임원의 해임을 요구해 관철한 데 이어 회장 인사에까지 개입했다. 성공적인 M&A(인수·합병)와 리딩뱅크 위상 회복, 전임 박근혜정권과의 무관함 등으로 윤종규 회장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오래전 유임으로 결론이 났음에도 노조는 연임 반대를 들고 나왔고 이 과정에서 여당 의원들까지 동원했다.

KB금융 이사회가 노조의 바람몰이에 흔들렸다면 KB금융은 다시 한 번 ‘잃어버린 10년’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노조의 부당하고 과도한 경영개입, 이른바 ‘노치’(勞治)의 문제는 진보정권 하에서 금융권의 새로운 리스크로 등장했다.

KB금융 경영진 인사는 한고비 넘겼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앞으로 KB국민은행장을 포함한 계열사 인사에 정치권력이나 노조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개입할지 더 두고 봐야 한다. 이들은 아주 작은 빈틈이라도 노릴 것이다.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을까.

이사회 및 대주주(과점주주) 구성 등 지배구조를 정비하고 짜는 것밖에 없다. KB금융이 이번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흔들리지 않은 이사회 덕분이다. 그렇지만 이것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우리은행처럼 안정적 과점주주 체제를 만들어야 하고 재일교포 주주라는 버팀목이 있는 신한금융그룹처럼 외국인 대주주를 영입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정치바람이 불든 노조바람이 불든 내분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답은 지배구조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