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이지혜 디자이너
이후 A씨는 사건이 원만히 해결될 수 있도록 남학생을 교무실로 불러 면담하고 학부모와 수차례 통화했다. 그런데 학폭위 당일, 학부모가 서류뭉치를 꺼내들었다. 그동안 A씨와 나눈 전화 통화를 전부 녹음한 뒤 변호사 자문을 받았던 것. 학부모는 학폭위원들 앞에서 A씨가 멋대로 사건을 확대했다며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학교는 쉬쉬하면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남학생은 경미한 조치를 받았지만 결국 전학을 가야 했다.
"학교폭력예방법(학폭법)은 학생간 화해를 막는 법이다." 학폭법에 대한 학교폭력 전문 변호사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시행 후 13년이나 지났지만 학폭법은 여전히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학생간 화해를 통해 피해자가 받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은 생략되고, 가해자는 자포자기한 채 탈선 청소년으로 남는다. 오히려 학교를 학부모들의 싸움터로 만들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학폭법 제13조 제2항 제4호에 따르면 학교는 학교폭력 발생 사실을 보고받을 경우 반드시 학폭위를 개최해야 한다. 이에 따르지 않으면 학교폭력을 축소·은폐했단 이유로 학교 측이 법적 책임을 지게 될 수 있다.
일선 교사들이 학교폭력 사건에서 적극적으로 화해·중재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 중학교 담임교사는 "학교폭력 사건에 교사가 개입하면 갑자기 학생과 학부모가 태도를 바꿔 교사를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교사 출신으로 학교폭력 사건을 전담하는 전수민 변호사는 "현행법은 일단 학폭위가 열리면 '학교가 할 건 다 했다'고 인정을 해준다"며 "그렇다 보니 일단 학폭위에 맡기고 행정적으로 처리하고 보자는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했다.
◇30분짜리 학폭위 후 '빨간줄'…"난 글렀다"며 자포자기
학폭위가 개최되면 학폭법 제17조 제1항에 따라 가해학생에게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 결론을 내야한다. 조치는 피해학생에 대한 서면사과부터 전학, 퇴학처분까지 총 9가지다. 가해학생이 받은 조치는 교육부 훈령인 '학교생활기록 작성 및 관리지침'에 따라 생활기록부에 기재된다. 9가지 조치 중 일부는 졸업과 동시에 생기부에서 삭제하게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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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입시절차가 대부분 졸업 전에 이뤄진다는 점이다. 상급학교에선 학교폭력 조치 내역이 삭제되기 전 생기부를 받아보게 된다. 김 소장은 "요즘 애들도 이 점을 다 알고 있다. '난 글렀다'며 자포자기하고 막 나가는 경우가 있다"며 "그래서 학부모들이 재심을 청구하고 소송까지 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교육부에 따르면 실제로 학폭위 처분에 불복해 재심을 청구한 건수는 2012년 572건에서 지난해 1299건으로 2배 이상으로 늘었다.
학폭위 구성도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학폭법 제13조 제1항에 따르면 학폭위는 5~10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데, 이중 과반수는 학부모 대표가 맡아야 한다. 학부모 대표들은 생업 등 각자의 사정으로 학폭위에 제때 참가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마련이라는 게 변호사와 교원들의 설명이다. 김 소장은 "일단 학부모를 학교에 부르기 어렵다 보니 30~40분 간 자료만 보고 학폭위를 끝내버리는 경우가 많다"며 "가해·피해학생을 불러 이야기를 듣고 화해시키는 자리 같은 건 없다"고 했다.
변호사들은 징계가 아닌 교육을 통해 학교폭력 사건을 지도할 수 있도록 교사에게 재량권을 부여하고, 꼭 필요한 경우에만 학폭위를 열도록 법을 고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전 변호사는 "지금 학폭법 제1조는 학교폭력 예방, 화해를 목적으로 한다고 돼 있지만 제2조부터는 전부 처벌규정밖에 없다"며 "학생에 대한 사법절차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교육 목적아라면 학교를 믿고 맡겨야 한다"고 했다. 김 소장은 "학생 사이의 사건은 수사하듯 조사해서 조서를 받는 식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라며 "무엇이 힘들고 아팠는지 이야기하고 화해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는 게 필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