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파커처럼 호텔서 살다 죽는 것"…도로시 파커 누구?

머니투데이 한지연 기자 2017.09.11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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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랄한 독설과 재치로 인기…호텔 스위트룸에서 글쓰기 즐겨

도로시 파커/사진=Poet Foundatin 제공도로시 파커/사진=Poet Foundatin 제공


최영미 시인이 유명 호텔에 1년간 살 수 있는 방을 내달라고 해 갑질 논란에 휩싸인 가운데 그가 언급한 미국 시인 '도로시 파커'가 다시 조명되고 있다.

10일 최영미 시인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내 로망이 미국 시인 도로시 파커처럼 호텔에서 살다 죽는 것'이라며 호텔이 방을 내 준다면 자신이 죽고 난 후 '시인의 방'으로 이름붙여 문화상품화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썼다.



도로시 파커(1893~1967)는 신랄한 독설로 유명한 미국의 시인이자 단편소설 작가, 시나리오 작가, 비평가다. 그는 주로 호텔에 투숙하며 글을 쓰기로 유명했는데, 뉴욕의 알곤퀸(Algonquin)호텔에는 '도로시 파커 스위트룸'이 있다.
알곤퀸 호텔의 도로시파커 스위트룸/사진=알곤퀸 호텔알곤퀸 호텔의 도로시파커 스위트룸/사진=알곤퀸 호텔
도로시 파커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하는 등 불우한 생애를 보냈다. 이 때문에 도로시 파커 또한 생애 내내 우울증에 시달리며 여러번 자살기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도로시 파커의 불우한 인생은 그의 직설적인 논평과 위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전해진다.

도로시 파커는 보그(Vogue)와 베니티페어(Vanity Farir)에서 드라마 등의 논평을 쓰며 평론가로 일을 첫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신랄한 독설로 베니티 페어에서 해고된 이후 라이프 지(Life)로 자리를 옮겼다.



도로시 파커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Algonquin Round Table)이다.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은 1920년대 당시 미국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그룹인 '바이셔스 서클'(Vicious circle)이 주도한 비공식적 작가모임이다. 존 F.케네디의 어린 시절 소원 중 하나가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의 멤버가 되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파커는 1920년대 당시 알곤퀸 호텔에서 묵었으며, 알곤퀸 라운드 테이플의 창립멤버로 1919년부터 이 모임에 참여했다. 도로시 파커 외에도 뉴요커 잡지 창립자인 헤롤드 로스(Harold Ross), 영화배우 로버트 벤츨리(Robert Benchley), 하포 마스(Harpo Marx), 극작가 조지 S.코프만(George S Kaufman) 소설가 에드나 페버(Edna Ferber)등이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의 멤버로 있었다.

알곤퀸 호텔(왼쪽)과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의 멤버. 가운데 여자가 도로시 파커./사진=빌글래드스톤알곤퀸 호텔(왼쪽)과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의 멤버. 가운데 여자가 도로시 파커./사진=빌글래드스톤
멤버들은 뉴욕의 알곤퀸 호텔의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으며 시사와 문학에 대해 토론했다. 알곤퀸 호텔의 라운드 테이블에서 많은 책과 영화가 탄생했으며 주간잡지 '뉴요커'(Newyorker)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뉴요커의 본사는 지금도 알곤퀸 호텔 맞은편에 위치해있다. 파커도 뉴요커에 논평을 여러편 실었다.


1922년 파커는 '그런 작은 그림처럼(Such a Pretty Little Picture)' 이라는 제목의 첫 단편을 발표했다. 1925년에 발표한 첫번째 시집 '이너프 로프'(Enough Rope)는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1929년엔 자신의 자서전인 단편소설 '빅 블론드'(Big Blonde)로 오 헨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파커의 이야기에는 가족, 인종, 전쟁 및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질문과 고민이 묻어난다. 소외계층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미국 내 흑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파커는 글을 쓰는 모든 분야에서 뛰어났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1930년대 할리우드로 옮겨 1937년 영화 시나리오인 스타탄생(A star is born)을 써 아카데미 상을 받았다. 파커는 정치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 후 할리우드를 휩쓴 반공주의에 대항한 좌파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할리우드에서 두 번째 이혼을 맞은 파커는 다시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호텔에서 글쓰기를 즐겼던 그는 1967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숨진채 발견됐다. 파커는 흑인차별에 반대하는 의미로 마틴루터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에게 전 재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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