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파커/사진=Poet Foundatin 제공
10일 최영미 시인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내 로망이 미국 시인 도로시 파커처럼 호텔에서 살다 죽는 것'이라며 호텔이 방을 내 준다면 자신이 죽고 난 후 '시인의 방'으로 이름붙여 문화상품화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썼다.
알곤퀸 호텔의 도로시파커 스위트룸/사진=알곤퀸 호텔
도로시 파커는 보그(Vogue)와 베니티페어(Vanity Farir)에서 드라마 등의 논평을 쓰며 평론가로 일을 첫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신랄한 독설로 베니티 페어에서 해고된 이후 라이프 지(Life)로 자리를 옮겼다.
파커는 1920년대 당시 알곤퀸 호텔에서 묵었으며, 알곤퀸 라운드 테이플의 창립멤버로 1919년부터 이 모임에 참여했다. 도로시 파커 외에도 뉴요커 잡지 창립자인 헤롤드 로스(Harold Ross), 영화배우 로버트 벤츨리(Robert Benchley), 하포 마스(Harpo Marx), 극작가 조지 S.코프만(George S Kaufman) 소설가 에드나 페버(Edna Ferber)등이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의 멤버로 있었다.
알곤퀸 호텔(왼쪽)과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의 멤버. 가운데 여자가 도로시 파커./사진=빌글래드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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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파커는 '그런 작은 그림처럼(Such a Pretty Little Picture)' 이라는 제목의 첫 단편을 발표했다. 1925년에 발표한 첫번째 시집 '이너프 로프'(Enough Rope)는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1929년엔 자신의 자서전인 단편소설 '빅 블론드'(Big Blonde)로 오 헨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파커의 이야기에는 가족, 인종, 전쟁 및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질문과 고민이 묻어난다. 소외계층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미국 내 흑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파커는 글을 쓰는 모든 분야에서 뛰어났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1930년대 할리우드로 옮겨 1937년 영화 시나리오인 스타탄생(A star is born)을 써 아카데미 상을 받았다. 파커는 정치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 후 할리우드를 휩쓴 반공주의에 대항한 좌파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할리우드에서 두 번째 이혼을 맞은 파커는 다시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호텔에서 글쓰기를 즐겼던 그는 1967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숨진채 발견됐다. 파커는 흑인차별에 반대하는 의미로 마틴루터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에게 전 재산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