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후일담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2017.05.27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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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김상미 시인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시인의 집]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후일담


1990년 ‘작가세계’로 등단한 김상미(1957~ )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는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서정주 ‘국화 옆에서’)이 한밤에 들려주는 사랑의 후일담(後日譚) 같다. 사랑, 즉 잡히지 않는 나비(남자)를 잡다가 실패한 후 쓴 실연과 시련을 진술하는 듯하다.

나는 한때 사랑에 빠졌지요
녹색 넥타이를 맨 남자
언제나 발코니 끝에 서서
먼산 바라보듯 나를 바라보던 남자
나는 그게 남자들의 본성인 딴생각인 줄도 모르고
내게 없는 큰 장점이라 생각하여
오랫동안 그 모습에 경탄하며 바라보았죠



그러다 아무르장지도마뱀을 발견했죠
녹색 넥타이를 맨 그 남자와 너무나 닮은 도마뱀
침대나 식탁 위에선 분홍 혀를 날름거리며 온갖 아양을 떨다가
궁지에 몰리거나 다급해지면
그 꼬리 잡힐까봐 마구 흔들어대다
급기야는 제 꼬리 댕강 잘라놓고 부리나케 도망치는 남자

나는 한동안 그 남자와 사랑에 빠졌지요
아무르장지도마뱀이 알을 까고 새끼를 어루만질 때 보이는
그 다정함과 늠름함이 너무 사랑스러워
내 발목이 퉁퉁 붓는 줄도 모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만 부르는 귀뚜라미들을 잡아
그 남자 앞에 제물로 바쳤지요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그 남자가 맨 녹색 넥타이가 분홍 넥타이로 바뀌었을 때
나는 울면서 내가 키우던 도마뱀들의 꼬리를 모두 잘라
뒷산에 내다버렸지요
인간이 파충류와 사랑에 빠지다니!

아무르장지도마뱀 같은 그 남자는
이제 새 꼬리 분홍 넥타이를 매고
마치 자신이 아무르장지도마뱀이 아니라는 듯
온 마을 온 시내를 미끄러지듯 싸돌아다니고 있어요

아무리 잘라내고 또 잘라내도 다시 자라는
얄미운 도마뱀 꼬리 같은 분홍 넥타이를 매고
아주 신나게 아주 의기양양하게!
- ‘아무르장지도마뱀’ 전문



시인을 잘 아는 시인들은 이번 시집이 자전시집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할 것이다. 그만큼 시인은 이번 시집에 사랑의 열정과 좌절, 기대와 체념 그리고 아쉬움을 사물에 기대, 때로는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시 ‘아무르장지도마뱀’은 한때 시인이 사랑했던 남자를 아무르장지도마뱀에 빗대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시인이 “한때 사랑에 빠”졌던 “녹색 넥타이를 맨 남자”는 “언제나 발코니 끝에 서서/ 먼산 바라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경탄하며 바라보”던 그 모습에 반해 “내 발목이 퉁퉁 붓는 줄도 모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만 부르는 귀뚜라미들을 잡아/ 그 남자 앞에 제물로 바”쳤다. 아무르장지도마뱀 같은 그 남자는 “침대나 식탁 위에선 분홍 혀를 날름거리며 온갖 아양을 떨다가” 궁지에 몰리자 “제 꼬리 댕강 잘라놓고 부리나케 도망”치고 만다. 이후 사랑의 상처는 오롯이 남아 있는 사람의 몫이다. 잠시 잠잠해지자 그 남자는 “새 꼬리 분홍 넥타이를 매고” “온 마을 온 시내를 미끄러지듯 싸돌아다”닌다. “아무리 잘라내고 또 잘라내도 다시 자라는” 남자의 바람기가 얄밉기만 하다. 더군다나 “아주 신나게 아주 의기양양”한 모습에 속에서 천불이 난다. 사람 환장할 노릇이지만 시인이므로 “시의 심장을 파먹”(‘공생’)으며 견디고 견딘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아, 그 앞에 네가 서 있었으면 좋겠어
새벽 편의점에서 사온 일회용 커피를 들고
밤새 외로웠던 현관문을 밀고 들어와
내겐 너무 커다래 질질 끌리는 내 얌전한 슬리퍼에
두툼한 네 발을 끼우고
이리저리 쿵쿵거리며
마음대로 냉장고 문도 열어보고
뻔뻔하게 속옷 서랍장도 열어보고
벽에 걸린 엄마 사진에 묵례 윙크도 살짝 해주었으면 좋겠어
그러다 어젯밤 벗어놓은 내 스웨터에 팔도 넣어보고
소파 위에 펼쳐진 내 시집을
콧노래 흥얼거리듯 읽으며
온 집안을 쿵쿵 휘젓고 다녔으면 좋겠어
우리집이 들썩들썩 살아 움직였으면 좋겠어
우리집이 새털처럼 명랑해져 구름 위를 둥둥 떠다녔으면 좋겠어
살아 있는 예쁜 아지랑이들이 온 집안으로 쳐들어와
우리집으로 놀러 와요, 우리집으로 놀러 와요
기막히게 아롱, 아롱대었으면 좋겠어
평생 잊지 못할 난생처음 봄이 찾아왔으면 좋겠어
- ‘난생처음 봄’ 전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현재진행형이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허물을 다 감싸주는 것. 지고지순한 사랑 역시 한 사람을 평생 그리워하며 한결같은 마음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다. “밤새 외로웠던” 시인은 사랑하는, 아니 사랑했던 남자를 기다린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아, 그 앞에 네가 서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새벽 편의점에서 사온 일회용 커피를 들고” “현관문을 밀고 들어와” 마치 남편이 귀가한 듯 행동하기를 바란다. 그럴 일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우리집으로 놀러”오라 간절히 원한다. 혼자 밤을 지새운 시인은 “우리집이 들썩들썩 살아 움직였으면 좋겠”다면서 “평생 잊지 못할 난생처음 봄이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드러낸다. 시는 소풍 가기 전날처럼 통통 튀는데,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심히 심각하다. 그래서 이 시는 더 슬프고, 더 아프다.

표제시 ‘오렌지’는 사랑하는 남자를 더 기다리지 않겠다는 결의를 드러낸다. “시들면서 내뿜는 마지막 사랑”과 “켰던 불 끄고 가려는 안간힘”에 대한 미련을 접으려는 것이다. 시인에게는 더 이상 상처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시인은 깨닫는다.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에도/ 남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사랑은 영원한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보내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별의식은 필요한 법이다. 하여 시인은 “네 속에 남은 한줌의 삶/ 흔쾌히 베어먹는”다.

시인은 환갑의 나이지만 아직도 소녀적 감성과 사랑, 상상력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채울 수 없는 사랑은 필연적으로 비극을 잉태한다. 더 쉽게 말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꿈꾸었고, 꿈꾸기에 좌절도 인내도 오롯이 시인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 길을 마다하지 않는 건 “끝내기 위해서 다시 시작하는 봄”(‘시인의 말’)을 믿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시인을 지탱시켜준 것은 사람이 아닌 책을 읽고, 그림을 감상하고, 영화를 보고, 산책을 하면서 느낀 것을 시로 쓰면서 견딘 시인 자신이다. 이번 시집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아주 깊고 오래된 집”(‘황홀한 침범-샤임 수틴’)에서 홀로 14년간 고독한 삶을 견딘 ‘영원한 누님’의 ‘천일야화’라 할 수 있다.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김상미 지음. 문학동네 펴냄. 128쪽/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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