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마 시작한 '성년후견인'…사각지대 '독거노인'

머니투데이 박보희 기자 2017.05.23 08:00
글자크기

[Law&Life-세상의 빈틈]①방치된 '의사결정능력장애인'…찾아내고 공공후견 지원까지 '부처간 연계' 필요

편집자주 톱니바퀴가 굴러가듯 정교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도 빈틈이 있습니다. 법은 있지만 지켜지지 않아 생긴 빈틈, 법끼리 부딪혀 생긴 모순이 만든 빈틈, 소수자라서 법이 없어서 생긴 빈틈,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소외된 곳에 서 있어서 생긴 빈틈, 세상이 변하면서 생긴 빈틈까지…우리가 모르는, 하지만 어느날 우리가 서있게 될 수 있는 빈틈을 찾아, 틈을 메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박 목사가 김씨네 모녀를 처음 만났을 때 살던 집(좌). 현재 김씨네 모녀가 살고 있는 집(우)박 목사가 김씨네 모녀를 처음 만났을 때 살던 집(좌). 현재 김씨네 모녀가 살고 있는 집(우)


#찢어진 벽지와 언제 세탁을 했는지 모를 이부자리. 한겨울 난방도 안되는 방 안에는 곳곳에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박모씨(64)가 발달장애인 가족인 김씨네 모녀를 만난 것은 지난 2014년 1월. 동네에 어렵게 사는 장애인 가족이 있다는 지인의 말에 찾아간 집에는 엄마와 세 딸이 있었다.

지방자치단체에 연락해 도와줄 방안을 찾았다. 하지만 이들에게 지원된 것은 기름 한 통 뿐. 알고보니 이들은 꽤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과수원을 운영하던 남편이 발달장애 부인과 세 딸을 돌봤지만, 사망하면서 이들은 방치됐다. 설상가상 남편의 형이 이들 소유의 땅을 담보로 돈을 빌리고 사망보험금까지 가져갔다. 돌봐줄 사람도 없었고 스스로를 돌볼 수도 없었지만, 서류상 재산이 많아 지자체에서도 법적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지자체와 협의 끝에 박씨는 이들의 공공후견인을 맡기로 했다. 거처를 옮기고 계절별로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부터 물건을 사는 법까지 하나하나 알려주고 생활을 챙겼다. 3년이 지난 지금 첫째 딸은 의사 표현이 가능해졌고, 정신지체 1급이던 막내딸은 3급 수준으로 향상됐다. 자폐로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둘째는 시설에 들어가 치료를 받고 있다.

성년후견인은 질병이나 장애·노령 등의 이유로 정신적 제약이 있는 성인(피후견인)에게 법원이 의사결정을 대신할 법적 후견인을 정해주는 제도다. ‘포괄적 법정대리인’으로 피후견인의 재산과 신상에 관해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지난 2013년 고령과 질병 등으로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하기 어렵고 생활능력이 떨어진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됐다. ‘재산관리인’ 정도로만 역할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개개인이 적합한 사회보장서비스를 받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후견인의 가장 큰 역할이다.



후견인을 선임하는 데는 돈이 든다. 법원에 후견인을 지정해달라고 청구할 때도, 후견인이 선임되면 매달 비용을 내야 한다. 성년후견인이 필요한 것은 ‘부자’들만이 아니다. 돌봐줄 가족이 없는 저소득층 중증 치매 독거 노인이나 보호자가 없는 지적 장애인 등 취약 계층에게 더 필요하다. 하지만 정작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방안은 제도 도입 4년째인 지금까지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고 있다.

◇발달장애인만 공공성년후견 지원…저소득·중증 치매·독거 노인은 ‘해당 없음’ = 박씨가 김씨 모녀의 공공후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취약계층 발달장애인을 위한 공공후견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달장애인이 아닌 의사결정능력장애인 등은 공공후견지원을 받을 수 없다. 관련 규정이 없는 탓이다.

‘발달장애인 권리보장과 지원에 따른 법률’ 제9조는 스스로 후견인 선임이 어려운 성년 발달장애인을 대신해 지자체가 후견인 청구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후견인 선임 비용도 정부가 지원하도록 해뒀다. 지자체는 이를 근거로 후견인이 필요한 발달장애인이 발견되면 법원에 후견인 청구를 하고, 보건복지부는 법률 지원과 공공후견인 활동비를 지원한다.


이는 발달장애인만을 대상으로 할 뿐 치매 독거 노인이나 그밖에 후견인이 필요한 정신장애인들은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소순무 사단법인 온율 이사장은 “발달장애인에 한해 공공후견이 시행 중이지만 다른 부분은 법이 없어 사각지대로 남아있다”며 “중증 치매 노인 등을 위한 법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법이 없어 어쩔 수 없어…무료로 좀 맡아주세요” =공공후견인이 당장 필요한 이들은 수시로 발견된다. 치매를 앓던 A씨가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자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이웃 주민이 경찰에 신고했다. 알고보니 A씨의 딸이 A씨는 요양원에, 정신지체 장애인인 오빠 B씨는 정신병원에 보내고 가족 재산을 처분해 사용해버렸다. 법원은 A씨와 B씨의 후견인이 필요하다고 결정했지만, 이들에게 남은 재산이 없었다.

법원은 한울정신건강복지재단 이사를 맡고 있는 송인규 변호사에게 무료 후견인이 돼 줄 것을 부탁했다. 이들이 공공후견지원 대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송 변호사는 이 두 건을 포함해 총 여섯 건의 무료 후견사건을 맡고 있다. 송 변호사는 “대부분 저소득 치매 노인은 후견인 신청조차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사건은 늘고있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정부 차원에서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단법인 온율의 배광열 변호사는 “독거 노인을 찾아가보면 타인이 친한 동생이라며 함께 살면서 기초생활수급비를 마음대로 사용하다가 관련 단체에서 조사를 나가면 갑자기 사라지는 경우부터 쓰레기장 같은 집에 방치돼 살고 있는 경우도 있다”면서도 “이런 경우도 본인이 거부하면 쓰레기조차 치워줄 수 없다. 이때 필요한 것이 이들의 의사결정을 대리해서 지속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후견인이지만
발달장애인을 제외하고는 지원할 방법이 없다”고 설명했다.

◇곳곳에 방치된 치매노인…‘지자체·복지부·법무부’ 연계해 찾아야 =어떤 식으로든 발견돼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다행이다. 더 큰 문제는 지원이 필요한 이들이 숨어있다는 점이다. 지난 14일 서울 은평구에서 혼자 살던 80대 노인이 숨진지 일주일이 지나 발견됐다.

집에서는 뇌질환 약이 다량 발견됐다. 노인의 죽음은 배달한 요구르트가 며칠째 쌓여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배달원이 주민센터에 신고하면서 드러났다. 배달원이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 언제 발견됐을지 알 수 없었다.

후견인이 필요한 이들이 직접 관련 단체를 찾아 도움을 청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박인환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성년후견제도 전문화·활성화를 위한 방안 연구’에서 “의사결정능력 장애인들이 스스로 성년후견 청구를 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며 “보호가 필요한 이들을 찾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누군가 담당해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자자체 차원에서 후견인이 필요한 이들을 찾아내고 실제 후견인 선임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부처간 업무 협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송영신 시니어희망공동체 상임대표는 “밖으로 나오고 드러내는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문제는 나오지 않는 이들”이라며 “이들을 찾아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찾동’과 같은 지자체 복지 시스템과의 연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직접 찾아 나서는 ‘찾아가는 동주민센터(찾동)’ 사업을 진행 중이다. 서울시 측은 “통반장이나 부동산 등 지역 주민의 교류가 많은 곳을 거점으로 정해 지역 현안을 파악한다”며 “65세 이상 노령층에게는 전원 연락해 찾아가 건강 체크를 하고 필요한 복지제도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공공후견 선임까지 이어지기는 힘들다. 역시 관련 법과 지침이 없기 때문이다.

◇“국선공공후견인이 필요하다”= 공공후견인 양성과 전문성 확보도 숙제다. 성년후견인은 지정된 기관에서 30시간 가량 교육을 받으면 자격을 얻을 수 있다. 공공후견인으로 지정되면 한 명 당 15만원의 활동비를 지원받고, 피후견인 수에 따라 최대 40만원까지 받을 수 있다. 일종의 ‘자원봉사’ 성격이 강하다.

‘성년후견제도 전문·활성화를 위한 방안 연구’에 따르면 지난 2013년 이후 지난해 말까지 약 3000여명이 후견인 교육을 받았지만, 실제 공공후견인으로 활동하는 이는 10%에 불과하다. 박 교수는 “정보 습득을 목적으로 했거나 후견 업무의 어려움과 미미한 활동 보수에 실망해 단념한 경우 등”이라며 “후견인의 충분한 인력 확보가 쉽지 않다”고 봤다.

성년후견 업무를 하고 있는 법조계 관계자 역시 “실제로 공공후견인이 됐다가 중간에 사임하거나 공공후견인이 피후견인을 방치하는 경우도 있다”며 “전문적인 공공후견인 양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가정법원은 국선공공후견인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가정법원의 한 판사는 “국선변호사처럼 월급을 받는 직업으로서의 공공후견인을 양성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라고 말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