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와 닉슨의 그림자

머니투데이 뉴욕=송정렬 특파원 2017.05.16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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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렬의 Echo]

'워터게이트사건'으로 1974년 8월 9일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유일하게 임기중 사임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 /AFPBBNews=뉴스1'워터게이트사건'으로 1974년 8월 9일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유일하게 임기중 사임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 /AFPBBNews=뉴스1


“녹음테이프, 연방수사국(FBI), 해임, 특별검사, 탄핵….”

배신과 음모가 넘쳐나는 정치 영화나 드라마속 대사에 나올 법한 단어들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주연의 2017년 현실 미국 정치를 다루는 미국 주요 언론의 최근 1면을 장식하는 단어들이다.

발단은 지난 9일 트럼프가 제임스 코미 FBI 국장을 전격적으로 해임한 일이다. 트럼프는 ‘일을 잘 못하는 무능한 사람’을 잘랐다고 주장한다. 물론 트럼프는 대통령으로서 그럴 권한을 갖고 있다. 문제는 시기다. FBI는 현재 민주당 전국위원회 등에 대한 러시아 해킹, 트럼프대선캠프와 러시아간 내통여부 등 러시아 대선개입사건을 수사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FBI 수장의 갑작스런 해임은 뭔가 석연찮고,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가 자신의 아킬레스건인 ‘러시아 스캔들’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해임 카드를 쓴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민주당에선 러시아 스캔들을 전담할 특별검사 요구를 넘어 탄핵론이 슬슬 고개를 들고 있다.

아직까지 트럼프의 탄핵이 현실화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게 미국 언론의 분석이다. 정황적 의심과 의혹은 충분하다. 하지만 이번 해임이 탄핵사유인 ‘사법방해’에 해당한다는 것을 증명할 결정적 한방(스모킹 건)이 없다. 더구나 탄핵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상하원은 모두 트럼프의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다. 한마디로 산 넘어 산이다.



이번 해임논란은 여러 면에서 리처드 닉슨을 미국 역사상 최초이며 유일하게 임기 중 사임한 대통령으로 만든 워터게이트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 언론들도 이번 해임을 닉슨 사임의 결정적 계기로 꼽히는 ‘토요일 밤의 대학살’에 비유한다.

닉슨은 1972년 11월 대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지만, 워터게이트사건이 점점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았다. 특별검사는 사건의 스모킹 건인 백악관 집무실 녹음테이프 제출을 요구했다.

‘대통령의 기록공개는 국가안보에 중대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협박성 발언으로 버티던 닉슨은 결국 최악의 수를 둔다. 1973년 10월 20일 법무부장관과 법무부차관에게 특별검사 해임을 요구했다. 하지만 장관과 차관은 이를 거부하고 옷을 벗었다. 차관보가 겨우 임시로 장관 바통을 이어받아 특별검사를 해임했다. 이것이 이른바 토요일 밤의 대학살이라고 명명된 사건의 전말이다.


이 사건은 1974년 8월 닉슨 사임의 결정타가 됐다. 보수지지층마저 등을 돌렸다. 하원은 탄핵을 가결했고, 대법원은 녹음테이프 제출을 판결했다. 닉슨이 몰락한 원인은 도청 사실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미국 국민들은 누구보다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대통령이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트럼프의 해임사건이 워터게이트급 태풍으로 발전할 필요충분조건을 갖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안한 변수는 있다. 바로 ‘예측불허’의 주연배우다. 트럼프는 애용하는 트위터에 “코미는 언론에 정보를 흘리기 전에 우리의 대화 내용을 담은 테이프가 없기를 기대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올렸다. 얌전한(?) 대통령의 언어를 거친 조폭 버전으로 옮기면 “함부로 입 놀리다간 골로 간다”다. 공개적 협박이다.

이번 사건은 정책의 호불호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대통령의 도덕성과 신뢰와 직결되는 사안이다. 트럼프의 악수가 계속되면 신뢰는 사라지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반전에 빠져들 수 있다. 이미 아군인 공화당 내부에서도 거센 비판이 쏟아진다.

북한의 핵문제로 한반도의 긴장감은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된 상황이다. 북한은 이에 아랑곳없이 미사일을 쏘아대고 있다. 미국의 정치적 불확실성은 우리에겐 또 하나의 리스크다. 매일 쏟아지는 트럼프의 트윗을 무심코 넘길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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