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 시평] 응보적 처벌과 용서의 조건](https://orgthumb.mt.co.kr/06/2017/04/2017040313462041848_1.jpg)
그러나 돌이켜보면 우리가 이처럼 치열한 삶의 과정을 겪으면서 얼마나 많이 성장하고 성숙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의 근대는 대략 백 년 전부터 시작됐지만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와 같은 사건이 민주적으로 가능했으리라고 상상하긴 쉽지 않다. 근대가 절대적으로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법을 최후의 의사결정 방식으로 채택할 만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한 것이다. 큰 틀에서 보면 경제 발전 속도 못지않게 정신적으로도 빠르게 성장한 셈이다.
정의를 지향하는 특성은 성인도 마찬가지다. 가령 ‘제3자 처벌 게임’을 이용한 한 연구에서 분배자는 무일푼의 수용자에게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돈을 할당할 수 있다. 그리고 제3자는 분배자가 수용자에게 분배하는 돈의 액수를 관찰한 후 그 분배가 불공정하다고 판단되면 그 분배자를 처벌할 수 있다. 그러나 처벌 시엔 자신의 돈을 지급해야 한다. 그 결과 분배자가 50% 이하로 불공정한 분배를 할수록 제3자는 그를 처벌하기 위해 자신의 돈을 더 많이 사용했다.
처벌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입장을 고려할 때 이들 간에 이룰 수 있는 최선의 접점은 위반에 따라 응당 받아야 할 일정한 고통이나 처벌과 함께 반성과 사과 그리고 합의와 용서라는 또 다른 요소가 납득할 만한 수준에서 그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그 하나의 이유로 응보적 처벌과 용서 모두 인간의 본성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적 용서나 오직 보복을 목적으로 하는 처벌은 능사가 아닌 듯싶다.
이 사건과 관련해 최근엔 용서가 정치권의 도화선으로 떠올랐다. 이 문제의 핵심은 용서가 무너진 정의를 회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지 여부다. 그러기 위해선 용서 이전에 충족돼야 할 조건이 있다. 예를 들면 무엇을 용서할 것인지 그 과오의 내용을 분명히 해야 한다. 또 과오에 대한 합당한 처벌과 함께 그 당사자의 사과와 반성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돼야 피해자는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부정이거나 묵인일 뿐이다. 용서는 오직 정의에 기반해서야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