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바로 그때, 누군가 들어온다. 옆을 스쳐 지나가는데 확 풍기는 술 냄새. 이제 일어나야지라는 생각에 엉덩이를 떼려 하는데 문제의 술 냄새 아저씨가 모래시계를 뒤집는다. ‘이건 뭐지? 한번 해보자는 건가?’
하지만 상황은 너무 불리하다. 그 안에서 5분이나 더 오래 있었고 술 냄새 아저씨는 치사하게 물수건까지 들고 들어왔다. '아저씨, 물수건은 반칙이잖아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게다가 문 앞에 자리를 잡았고. 이건 보나 마나 결과가 뻔한 시합.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의 손주가 늙어 죽을 만큼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겨우 2분이 지났고, 나는 그곳에서 빠져나와 냉탕에 몸을 던졌다. 천국이 별거인가? 주지육림과 경국지색이 있어야만 친국이 아니다. 사우나에 8분 있다가 냉탕에 들어가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
마흔의 나이에 삼대독자 아들을 얻으신 아버지는 그 어느 곳이든 아들을 데리고 다니셨고, 그중에서도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셨던 곳은 목욕탕이었다. 나를 데리고 목욕탕에 갈 때 아버지의 표정은 그 어린 나이에도 ‘세상을 다 가진 남자의 표정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혹시라도 탕이 뜨겁다고 칭얼거릴까 봐 살살 물을 뿌려주시고, 그렇게 더운물에 적응이 되면 번쩍 들어서 탕에 나를 넣고, 탕 안에서 물장난을 치는 내 모습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표정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아버지의 가장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한 가지 이상했던 건, 그렇게 끔찍이도 아꼈던 아들을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당신이 직접 때를 밀어주거나 하지 않으시고 꼭 목욕관리사에게 내 몸을 맡기셨다. 어릴 때는 워낙 깔끔한 성격에 더러운 것을 싫어하는 아버지가 내 몸에서 나오는 때가 싫어서 안 밀어주셨나 생각했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 생각이 나서 여쭤보니 ‘혹시라도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마음에 손에 힘이 들어가서 널 아프게 할까 봐 그게 걱정이 돼서’ 목욕관리사에게 맡기셨단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을 버리고 어떻게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러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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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둘만의 목욕 시간이 아버지의 시간이었다면 목욕탕에서 나온 이후부터는 나의 시간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고민 중의 하나였던 목욕 후의 바나나 맛이 나는 우유와 야쿠르트 중에서의 선택. 언제나 결론은 양손에 우유와 야쿠르트를 하나씩 쥐는 것이었지만 선택의 순간만큼은 마치 그레이트 마징가와 마징가Z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문제였다.
그때의 추억 때문인지 난 오늘도 이만 원을 들고 목욕탕으로 향한다. 양손에 우유와 야쿠르트를 하나씩 들고 올 생각을 하면서. 그렇다. 나는 추억을 먹고 사는 과거 지향적 동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