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친구의 아내를 잊지 못하는 나는

머니투데이 공광규 시인 2017.02.25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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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송종찬 시인 '첫눈은 혁명처럼'

[시인의 집] 친구의 아내를 잊지 못하는 나는


화자는 사랑을 묻는 사람에게 시베리아 벌판에 핀 엉겅퀴 한 송이를 보여주겠다고 한다. 벌판에 ‘반란처럼 피’는 원색의 엉컹퀴는 눈이 쌓이고 안개가 덮는 곳에 피는 야생화다. 엉겅퀴는 반역과 추위라는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피는 꽃이다. 유형의 길을 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가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지쳐서 죽은 여인이 환생한 꽃이기도 하다. 진정한 사랑은 따뜻하고 비옥한 곳에 자라나는 꽃이 아니라, 한 해에 열 달이나 눈에 덮이는 춥고 삭막한 벌판에서 피어나는 꽃이라는 시인의 의도다.

시집에는 레닌 동상, 북국, 시베리아, 보드카, 소련, 스탈린, 모스크바, 백야, 이루쿠츠크, 레닌그라드, 카잔성당 등 러시아의 지명이나 인명이 많이 나온다. 시인은 남도의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다. 1993년 등단해 시집 ‘그리운 막차’와 ‘손끝으로 달을 만지다’를 내었으며, 러시아어 시집 ‘시베리아를 건너는 밤’을 냈다. 현재 기업의 모스크바 주재원이기도 하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수식어가 어설퍼지는 시베리아 벌판에서” 자신이 “녹아 없어질 한 점 눈발이었거나 먼 길 떠나는 밤 기차의 기적이었”다고 한다. 시인의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설원의 발자국 같은, 밤새워 쓴 시들” 가운데 ‘상사화’가 눈에 띈다.



한 가지에서 피어난 잎이
꽃을 그리워한다면
그립다 한다면

만나지 못하리
친구의 애인을 사랑했던 나에게
첫사랑은 없다



바람 불면 지척에서
흔들리는 가을 곷 그림자

한 가지에서 피어난 꽃이
잎을 그리워한다면
애달프다 한다면

친구의 아내를 잊지 못하는 나는
비바람 불어도
흔들리지 못한다


봄 가을 사이
석양에 핀 지워지지 않는
붉은 꽃
- ‘상사화’ 전문


시인의 시에는 ‘사랑’이 많이 등장한다. 러시아에서의 경험을 제재로 한 시집 전반부의 시들과 한국에서 경험을 형상한 후반부의 시를 관통하는 하나의 어휘는 사랑이다. 실패한 옛사랑과 첫사랑, 꽃이나 산과 같은 자연물에 대한 사랑, 대상이 없는 막연한 추상으로서 사랑 등 다양한 의미로 사랑을 변주한다. 위 시에서 화자는 “친구의 애인을 사랑했던 나에게/ 첫사랑은 없다”고 단언하는가 하면, “친구의 아내를 잊지 못하는 나는/ 비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더하여 다른 시 ‘불면’의 압축과 비유가 빛난다. 봄날 비가 와서 “금세 피어날 듯한/ 꽃봉오리 아래 맺힌/ 그렁그렁”한 빗방울에서 맑고 투명한, 그러면서도 “터질 듯”했던 사랑을 환기한다. 우리 시단에서 보기 드문 러시아 제재의 시와 연연마다 농축된 사랑에 대한 변주를 겨울의 끝에서 들어보길 권한다.

◇첫눈은 혁명처럼=송종찬 지음. 문예중앙 펴냄. 112쪽/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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