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문화계의 굴레…성역(性域)과 성역(聖域)

머니투데이 구유나 기자 2017.02.21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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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적 외풍에도 끄떡없는' 성역(聖域)을 주장하기 앞서 성역(性域)이라는 오명을 씻어야 한다."

공연 관련 일을 하는 한 20대 여성의 절규다. 문화예술계는 최근 한바탕 풍파를 겪었다. 정부가 반정부·진보 성향의 문화예술인 지원배제 명단, 즉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수많은 예술가들이 거리로 나갔다.

정치적인 상황이 이렇다면 문화계 내부는 어떨까. 핍박받는 문화계에서 을 중의 을로 통하는 여성들은 지난해 말부터 '#문화계_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고발 활동을 시작했다. 성폭력은 주로 작가와 작가 지망생, 교수와 학생 등 권력 구도가 명확한 관계에서 발생했다.



"문단과 영화계 등 문화예술계의 남성중심적인 분위기와 도제식 시스템 때문에 부조리한 일을 당하고도 소리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겁니다."(연출가 A씨)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가 실시한 '2016 출판계 성폭력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업무와 관련해 직접적인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고 응답한 비율은 68.4%였다. 그러나 이 중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응답한 비율이 77.3%에 달했다.



수많은 피해자들이 문화예술계 내부의 공고한 카르텔을 피해 SNS 상에 임시 거처를 차린 이유다. '페미라이터', '푸시텔' 등 다양한 단체들의 주된 목적은 피해 사례를 수집하고 기록해 문화계 성폭력을 소모적인 이슈가 아닌 사회적 논의로 끌어올리는 것.

그러나 갈 길이 멀다. 100일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과거 성폭력 소지가 있는 자신의 언행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가해자로 지목된 일부 개인 및 단체는 피해자를 협박하거나 명예훼손으로 역고소했다. 인터넷 상에서 문화계 성폭력 문제가 이따끔씩 남녀 대립 구도로 번지는 것도 피해자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다.

대학로를 주무대로 활동하는 연극배우 3명이 함께 술을 마시던 여성을 상대로 집단 성폭행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며 구속된 사실도 최근 알려졌다. '예술은 성역(聖域)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난제로 남아있다. 하지만 또다른 갑을 관계 속 피해자가 없어지지 않는 한 성역(性域)이라는 비아냥은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기자수첩]문화계의 굴레…성역(性域)과 성역(聖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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