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탄핵vs박근혜탄핵/머니투데이 더300, 김성휘 기자·이승현 디자이너.](https://thumb.mt.co.kr/06/2016/11/2016113014087677256_3.jpg/dims/optimize/)
"(박근혜 대통령의) 제3자 뇌물죄를 탄핵안에 적시했다."(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 2016년 11월28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4년 3월12일 국회의 탄핵안 가결로 직무가 정지됐다. 앞서 3월9일 당시 재적 과반(136명)이 넘는 159명이 탄핵안을 발의했고, 193명이 찬성투표했다. 항의하며 절규하는 열린우리당 의원들과, 국회의장(박관용 의장) 질서유지권 발동으로 이들을 끌어내는 모습이 국민 기억에 남았다.
◇국민은 반대인데 野 '오판' 승부수..역풍에 좌초
노 대통령은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끊임없이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를 당부했다. 2월24일 방송기자클럽 초청 회견에서 나온 '압도적 지지 기대' 발언이 그중 하나다. 중앙선거관리위는 3월3일 이 발언이 공직선거법 9조 위반이라고 판단했고 야권은 탄핵에 착수했다.
야당은 돌파구가 필요했다. 한나라당은 이른바 차떼기 사건으로 몰락 직전까지 내몰렸다. 민주당은 정권을 재창출한 여당이었지만 열린우리당 세력이 이탈, 호남에 고립된 군소야당으로 추락했다는 박탈과 배신감이 컸다. 총선에 승부를 걸지 못하면 당의 운명이 위태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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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과 야당은 2002년 대선 과정에서 벌어진 정치자금 사건을 놓고 가뜩이나 갈등이 높았다. 노무현캠프 측 정대철 이상수 등이 연루된 불법자금 사건, 최도술 여택수 안희정 등의 선거자금 조성 의혹만으로도 대치가 첨예했다. 이 와중에 대통령이 선거중립을 지키지 않는 발언과 태도를 유지한 것이 여야 대치에 기름을 부었다. 노 대통령이 사과요구나 여야 영수회담을 수용할 수 없다고 맞서면서 탄핵 시계는 더 빨라졌다. 박관용 국회의장은 노 대통령의 오기정치가 탄핵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국회 구성은 탄핵 가결을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한나라당 144석, 민주당 62석만 합해도 탄핵가결정족수 181석을 훌쩍 넘겼다. 자민련도 끝내 탄핵에 동조했다.
![2004년 3월 12일 박관용 국회의장이 노무현대통령의 탄핵안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사진=뉴시스](https://thumb.mt.co.kr/06/2016/11/2016113014087677256_2.jpg/dims/optimize/)
탄핵은 거센 역풍을 맞았다. 탄핵안 가결 한달 뒤인 4월15일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152석이란 단독과반으로 승리했다. '탄돌이' 즉 탄핵 역풍 덕에 당선된 국회의원들이 여당을 구성, 17대국회의 정치상황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총선 한달 뒤인 5월14일 헌법재판소는 심판청구를 기각했다. 노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은 인정되지만 파면할 정도는 아니라고 봤다. 경제와 국정파탄 또한 전적으로 대통령 책임으로 보고 탄핵하기엔 무리라고 결정했다. 노 대통령은 63일간 정지됐던 직무에 복귀했다.
무엇보다 국민여론 다수가 탄핵에 부정적이었다. 노 대통령은 임기 첫해부터 국정 지지율이 20%대로 썩 높지 않았다. 하지만 여론은 선거개입 발언을 사과해야 한다면서도 탄핵까지는 아니라고 봤다. 그 해 3월6일 중앙일보 조사는 사과해야 한다는 응답이 61%였지만 탄핵안이 국회 제출된 3월9일 KBS 조사에선 탄핵 반대 여론이 65.2%를 나타냈다.
헌재는 이런 민심이 표출된 총선 이후 결정을 내렸다. 결국 당대의 민심과 여론이 탄핵의 최종 결과에 영향을 준 셈이다. 2016년의 촛불 민심은 2004년과는 반대로 흐르고 있다. 거리로 나온 국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 사퇴(하야)를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