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병의 휴머노미]당당하지 못했던 국민연금

머니투데이 강호병 뉴스1 부국장 대우겸 산업1부장 2016.11.25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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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부국장대우 겸 산업1부장뉴스1 부국장대우 겸 산업1부장


국민연금이 ‘부당하게’ 찬성했다고 해서 논란이 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은 ‘최후통첩게임’(Ultimatum Game)과 비슷한 데가 있다. 최후통첩게임이란 성과분배에서 칼자루를 쥔 사람이 얼마를 나눠줄지 결정하되 분배받는 사람의 동의를 얻어야 주어지는 소득을 같이 향유할 수 있는 게임이다.

여기서 분배율의 결정권을 쥔 곳은 삼성이다. 합병기준가는 주가만 이용해 일정 공식에 따라 기계적으로 산정하도록 법에 정해져 있어 시점만 선택하면 자동으로 합병비율이 결정된다. 삼성은 지난해 5월26일 양사 합병을 결의했고 비율은 1대0.35(삼성물산 1주당 제일모직 0.35주)로 정했다.



이에 대해 엘리엇을 비롯한 일부 주주의 반발이 거셌다. 합병비율 산정에 삼성물산 자산가치가 덜 반영됐다는 서운함, 대주주에게 유리한 시점에 합병을 결정했다는 불만이 복합된 것이다.

그러나 합병비율이 삼성물산 주주에 특별히 불리한 시점에 선택됐다는 근거는 없다. 최선은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고 최악도 아닌 일상적 수준이다. 제일모직이 에버랜드와 합친 후 신주가 상장된 2014년 12월18일부터 제일모직과 합병 때문에 삼성물산 거래가 정지된 2015년 8월26일까지 제일모직 주가 대비 삼성물산 주가비율은 0.383으로 나타난다. 1대0.35라는 공식 비율과 큰 차이가 없다.



합병 결의 시점으로 한정해도 비율은 0.40정도로 나온다. 삼성물산 주가가 호주 투자손실 등으로 2014년말 수준에서 게걸음했지만 제일모직 주가도 오락가락한 탓에 비율 자체가 크게 떨어지진 못했다.

그리고 여타 주주 입장에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은 합병비율만 보고 찬성 여부를 선뜻 결정하기 힘든 문제가 있다. 가령 양사 합병을 무산시켜 당시 체제를 유지할 경우 삼성이 더 잘 된다는 보장이 있느냐는 것이다. 당장의 합병비율엔 불만이 있더라도 삼성에 기회를 줘서 더 노력하게 할 수 있다면 합병 찬성이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실제 양사 합병 후 건설업종 주가가 크게 내렸지만 통합 삼성물산 주가는 그보다 덜 빠졌다.

넓게 보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은 지배구조 단순화라는 해묵은 숙제를 풀어가는 과정이다. 삼성은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그룹처럼 조기에 지주회사로 전환하지 못한 채 성장시대의 지배체제를 유지했다. 불안정하고 복잡한 지분구조 때문에 행동주의펀드의 표적이 돼온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기관투자자라면 오너경영체제를 부정하지 않는 한 삼성의 지배구조를 간단하게 만들어서 안정된 경영권을 바탕으로 경영투명성을 높이면서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에 골몰하도록 역할을 할 사명이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국민연금의 결정 과정은 참으로 아쉽다. 거대투자자로서 직면한 이행상충 문제를 떳떳이 의제로 내걸어 폭넓은 논의를 거쳐 당당히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고 떠밀리듯 졸속으로 결정한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외압이나 로비에 휘둘린 이미지를 준 것이다.

전후 상황을 보면 국민연금이 대기업 지배구조와 관련된 이슈에 중심입장이 없었던 것 같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앞서 유사한 성격의 SK C&C와 SK의 합병이 있었지만 국민연금은 천착하지 않았다. 이때 투자위원회가 명확한 문제의식을 갖고 의결권 전문위와 교감하려는 노력들을 했거나 자기입장이라도 분명히 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해 삼성에 이르러 절차, 입장의 일관성 상실이 크게 나타났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결의 당시 22조원의 삼성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었다. 국민연금 투자위원회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전체 삼성포트폴리오, 국민경제 전체 차원에서도 당위성이 있는지 검토하는 것이 당연했고 판단이 섰다면 당당히 입장을 발표했어야 한다.

대승적 차원에서 삼성의 앞날을 위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하되 그 대가로 경영투명성과 배당을 포함해 더 많은 주주이익 환원 등을 당당히 요구했다면 지금과 같은 난맥은 덜했을 것이다.

국민연금이 내린 삼성물산 ‘합병 찬성’ 결론 자체는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아쉬운 것은 소신과 절차적 당당함의 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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