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세계

머니투데이 이영인 (필명) 2016.12.28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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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과학문학공모전 단편소설] 가작 '네번째 세계' <6> 시간

일러스트=임종철 디자이너일러스트=임종철 디자이너


AT. 18

스티브와 곤살로가 하루종일 둘이서 끙끙대더니 믿기 어려운 결론을 가져왔다. 잠깐 이야기하자면 참으로 기특한 녀석들이다.

시아의 실행 프로그램을 해석한 결과 시간과 관련된 무언가 라는 것이다. 프로그램의 이름은 적절한 번역이 없었다. 번역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일반 상식으로는 번역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우리 사이에서는 프로그램 F라 부르고 있다. F는 F**K의 약자다. 이 거지같은 물건이 우리를 엿먹이고 있으니 말이지.



일단 가장 연관도가 높은 단어가 시공간이며, 그 다음으로 많은 것이 시간이었다. 그밖에 비가역, 인과 등의 단어들이 많이 쓰였다.

아직도 우리는 우리들의 상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중요한 포인트는 블랙홀이 아니라 시간이라고 생각된다! 블랙홀, 특히 강한 중력은 시간(정확하게는 시공간)을 왜곡시키지. 게다가 둘의 연구는 같은 이론을 원류로 하고 있다. 상대성이론.



우리에게는 너무 수준이 높은 것이 나왔다. 시공간은 블랙홀 이상으로 연구가 적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사실 우주를 쏘다니면서도 이에 대한 고찰은 별 필요가 없었다. 기껏해야 중력과 속도의 영향때문에 미약한 시차(몇 초에서 몇 분)가 발생하니 감안해야하는 정도였고.

원래 이 분야의 전공자이거나 천재라도 있다면 우리가 가진 자료에서 유용한 것을 뽑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린 전공자들도 아니고, 천재는 더더욱 아니며, 시간마저 넉넉하지 못하다.

곤살로도 이제 더 이상은 모르겠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고보면 최근 꽤나 무리하는것이 이래저래 부담감을 느끼는 듯 하다.


토론 끝에 자료 검토방식을 조금 바꾸었다. 이전까지는 시아보다는 우리의 관찰한 것과 유사한것들, 그러니까 블랙홀과 블랙필드 쪽을 집중적으로 검토했었는데, 사례가 워낙 괴팍하다보니 그다지 성과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는 진척이 없을 것 같아 이제는 시아가 뱉어내는 키워드를 기준으로 검토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면 번역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처음에는 과학 외적인 자료들도 살펴볼까 했었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인력이 부족하여 포기했다.

드디어 괴생물체의 조사를 시작했다. 뭐,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의료 키트의 간이 분석기기가 하는 것이지만. 이 쪽도 계속해서 실험이 오류투성이다. 샘플을 채취하여 분석해보면 7~8할은 분석 불가, 나머지는 선원들의 데이터가 검출되었다. 대부분의 샘플이 오염된 상태이다.

따지고보면 샘플 채취도 쉽지 않다는 얘기다. 스타니슬라프 녀석이 원래 하던 업무가 아니어서 서툰 것도 있겠지만 함선은 원래 우리가 지내던 공간이다. 알게 모르게 우리의 피부 각질이나 침, 땀, 머리카락 등이 공기 중에 퍼져있을 것이고 이런 것이 자꾸 딸려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괴생물체들은 시작부터 '우리에게 오염된' 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상오염을 감안해서 분석하는 방법도 있다고 들었는데 스타니슬라프는 당연히 그런 작업은 익숙하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 그 생물체들이 좀 불쌍해졌다. 녀석들 입장에서 보자면 이상한 곳으로 끌려들어와 외계인에게 감염되고 몰살당한 것이다. 뭐, 이제는 위협거리가 아니라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좋은 뉴스는 의료키트는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최소한 수천 번은 검사할 수 있다. 우리에게 얼마 남지 않은 멀쩡한 장비인 덕택이다. 샘플도 널려있으니 스타니슬라프가 연습할 기회는 충분하고, 익숙해지면 괜찮은 결과가 나오겠지. 라다가 할때는 쉽게쉽게 하던 것 같았는데.

녀석이 그립다. 죽은 놈들이 그립다. 가족도 그립다.

AT. 21

먼저 확실한 것부터 정리한다. 프로그램 F의 이름은 '시공간 축 이동기 제어 장비 알고리즘' 정도로 번역되고 있다. 매끄러운 번역은 아니지만 의미는 충분히 전달된다.

시아는 타임머신이다.

처음 이 소리를 들었을 때는 욕지기를 주체할 수 없었다. 수많은 감상이 스쳐지나갔지만 이놈 때문에 생사의 기로에 놓인 상태라 짜증과 공포밖에 남지 않는다.

사실 농담 수준의 발상이었지만 이미 나왔던 추측 중에 하나이긴 했다. 당연히 진짜로 그따위 물건일 줄은 몰랐다. 그 밖에 프로그램에 있는 옵션값이나 수치 등을 봤을때, 시간 이동에 관련된 물건이라는 점에는 대부분 동의했다. 번역이 맞다면 말이지... 그놈의 블랙필드라는 것이 튀어나온 이후부터는 현실감각을 잃은 채 그저 앞뒤가 맞는 것으로 만족하는 중이다. 정말 이걸 우리 말고 제대로 된 학자들이 봤으면 환장을 하고 달려들었을 것 같은데 아쉽군.

문제는 이 작은 괴물이 뭘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것이다. 프로그램 F의 구체적인 작동법도 그렇고 시공간 이동의 원리도 그렇고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우리의 현실세계에서는 진지한 과학자가 실제로 타임머신을 연구하는 것조차 본 적이 없다. 당연히 원리나 이론도 전무하다. 그런데 갑자기 완성품이 튀어나왔고, 제어 프로그램은 외계어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 집으로 갈 수 있다.

신이 존재한다면, 패고 싶다.

일단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이동에 관한 자료들을 뒤적거려봐야겠다. 덧붙이자면 스티브와 곤살로는 보기 안타까울 정도로 딱한 꼴들을 하고 있다. 시아의 번역과 해석에 희망이 있는 만큼 선원들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다시피 지켜보기 때문이다. 좀 쉬엄쉬엄 하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랬다간 반란이라도 일어날 기세다. 반란이라고 하기엔 이제 인원도 얼마 없지만.

AT. 22

며칠 동안 시간이동에 대하여 알아낸 것들을 종합해본다. 아직 헷갈리는 것들이라 나중에 다시 보기 위해 적어둔다.

시간이동을 할 수 있는 방법 중 제대로 검증된 것은 많지 않다.

먼저, 미래로 가는 방법이 있다. 시간이라 함은, 전 우주에서 통용되는 절대적인 기준의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 속도나 중력에 따라 상대적으로 다르다, 이 점을 밝혀낸 것이 상대성이론이다. 강한 중력 속에 있거나, 혹은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 시간의 흐름이 변한다. 강한 중력이나 가속도는 시공간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빛의 속도로 달린다면, 우리는 미래로 갈 수 있다.

사실 미래로 가는 것은 우리도 늘상 하는 일이다. 광속만큼은 아니어도 별과 별 사이를 고속으로 오가는 우리들은 아주 미세하지만 지구와 시간대가 달라져서 가끔씩 시계를 리셋하곤 했다.

우리 현실에 반영해보자면 블랙필드가 블랙홀을 대체하는 무언가일 수 있겠다. 블랙필드를 이용해서 시간이동을 하는 것은 꽤 가능성 있는 이야기이다. 혹은, 역으로 시간을 조절하여 블랙필드를 형성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만약 시아가 단순히 이런 메카니즘으로 움직일 경우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알려진 바로는 과거로 가는 법과 미래로 가는 법은 원리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과거로 이동하는 방법은 보다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광속과 똑같이 달려봤자 과거로는 갈 수 없고, 질량을 가진 물체라면 광속 이상의 속력을 내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과거로의 이동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이론상으로나마 가장 그럴싸한 것은 시공간이 일그러진 부분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웜홀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웜홀은 시공간에 균열이 났을 때, 서로 다른 시공간을 이어주는 통로라고 한다. 개구멍이나 지름길 같은 개념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이 경우엔 과거 뿐 아니라 미래로도 이동이 가능하다. 이 역시 블랙 필드가 시공간에 영향을 준다고 가능하면 가능할 것 같다.

그 외로 여러 가지가 있었다. 예를 들면 우주 자체의 시공간이 뒤틀려 있을 경우에도 가능하단다. 그러나 이런 것은 블랙필드를 끼고 있는 우리 상황에는 맞지 않아 보인다.

우리가 실제로 시간여행을 한 것인지, 지금 하는 중인 것인지, 어디로 얼마나 왔는지 아직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차라리 과거로 살짝 돌아간 것이라면 좋겠다. 그러면 어떻게든 미래로는 돌아갈 방법이 있으니까.

하지만 미래로 움직이는 기능밖에 없는 것이라면, 우린 다시는 우리가 살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만일 그렇다면 절망할 수 밖에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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