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사라진 내원마을, 그 뒤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2016.11.05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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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자연과 인간의 공존은 불가능한 것일까

편집자주 여행은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수단이다. 여행자들이 전하는 세상 곳곳의 이야기는 흥미와 대리만족을 함께 안겨준다. 이호준 작가가 전하는 여행의 뒷얘기와 깨달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내원분교와 내원산방이 남아있을 때의 내원마을 모습/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내원분교와 내원산방이 남아있을 때의 내원마을 모습/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경북 청송 주왕산. 가을산은 잘 익은 김치처럼 감칠맛이 있다. 어미 품을 떠난 단풍잎들이 냇물을 타고 먼 길을 떠난다. 떠남이 있으면 만남도 있는 법. 조금 성급하긴 하지만 그들의 이별 위에 아우성처럼 펼쳐질 내년 봄의 향연을 그려본다. 도시인들의 발길은 산에서도 분주하다. 로마병정 같은 힘찬 걸음으로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지나간 자리에서 뽀얀 먼지가 피어오른다.

길은 평탄하게 펼쳐지고 날씨는 온화하니, 마음이 풍요롭다. 산 초입의 대전사(大典寺)를 한 바퀴 돌아본 뒤 걸음을 재촉하여 제3폭포까지 어렵지 않게 오른다. 주왕산은 721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하지만 어느 명산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비경을 품고 있다. 특히 곳곳의 기암절벽과 폭포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탐방객을 불러 모은다.



제3폭포를 지나 다리를 건너고서부터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진다. 오래된 넥타이처럼 멋대로 풀어진 길이 끊어질 듯 이어진다. 이제야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가 제대로 귀에 들어온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궁금증이 자꾸 걸음을 재촉한다. 어떻게 변했을까. 그래도 자취는 남아있겠지. 저만치 개활지가 눈에 들어오면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드디어 내원마을이다. 아니, 내원마을이 있던 곳이다. 하지만 시선이 제대로 가 닿기도 전에 신음부터 터진다. 이럴 수가…. 아무 것도 없다. 내원분교가 있던 자리, 찻집 내원산방이 있던 자리, 흰 개가 해바라기를 하던 곳에는 억새들이 무성하게 자라 키를 재고 있다. 새로 둘러친 목책만이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고 문명이 존재했다는 걸 강변하고 있다. ‘환경저해시설 철거 안내’라는 간판이 없었다면, 한때 수백 명이 깃들어 살던 동네라는 사실이 상상조차 안 될 것 같다.



내원마을은 ‘전기 없는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꽤 많이 알려져 있었다. 임진왜란 때 피란을 온 사람들이 마을을 이뤄 400년 이상을 살았다고 한다. 전기도 없고 수도도 없었지만 많을 땐 70여 가구가 살았을 정도로 번성했다. 학교는 물론 양조장까지 있었다. 그렇게 오래된 마을을 없앤 명분은 환경보호였다. 일부 주민이 관광객을 상대로 음식점과 민박을 하는 바람에 수질 오염이 심각해졌다는 것이 철거의 이유였다.

모두 철거한 뒤 자연생태계가 복원된 모습/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모두 철거한 뒤 자연생태계가 복원된 모습/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마지막 모습을 사진에 담기 위해 찾았던 것은 2008년 가을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았던 세 가구가 떠난 뒤에도 학교 건물과 내원산방은 남아 있었다. 그해 말에 그 두 건물마저 헐렸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지워졌을 줄은 몰랐다. 그 어디에도 호롱불을 밝히고 오순도순 살던 사람들의 흔적은 없다. 텅 빈 가슴으로 억새 사이를 거닐다 보니 오만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오염의 원인이 되는 마을을 없앤 건 옳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숲과 깨끗한 물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차원에서 말이다. 화답이라도 하듯, 자연은 놀라운 복원력을 동원해 수백 년 인간의 자취를 몇 년 만에 털어내 버렸다. 하지만 빛은 늘 그림자를 동반하는 법이다. 그런 ‘위대한 복원’ 뒤에는 고향을 빼앗긴 사람들도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어찌 됐을까. 더러는 새로운 삶에 적응했을 테고, 더러는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또는 낯선 도시에 흘러들어 ‘잉여인간’으로 살아가기도 할 것이다.

대개는 운명에 순응하듯 떠났겠지만, 끝까지 남아 뼈를 묻고 싶었던 주민이 왜 없었을까. 그들에겐 참 억울한 일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단 한순간이라도 자연에 신세지지 않고 살아본 적이 있던가. 그렇다면 다함께 기대어 사는 마당에 누가 누구를 쫓아낼 수 있단 말인가. 왜 그들이 살던 곳만 ‘환경 저해시설’이 되어야하는가.

머리를 흔들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상념을 털어버린다. 다시 둘러봐도 눌러 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희미하게 남은 돌담들 사이, 한 때 사람살이를 지켜봤을 나무들은 여전히 의연하게 서 있다. 그들에게 기대어 귀를 대고 있으니 어디선가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이곳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어린 시절을 보냈을 아이들. 이제 그들에게 고향은 없다. 친구들과 다녔던 학교도 사라졌다.

화두 같은 물음 하나가 가슴을 싸하게 한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은 불가능한 것일까. 정말 풀 수 없는 숙제일까.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사라진 내원마을, 그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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