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이 노루목이라고? 장항선의 종점인 장항이 아니고…

머니투데이 홍찬선 CMU 유닛장 2016.10.25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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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선의 세상읽기] 보국안민의 보국은 輔國일까, 保國일까

전남 화순에는 赤壁(적벽)이 있다. 영산강의 지류인 적벽강을 막아 생긴 거대한 호수인 同福湖(동복호)에 잠겨 생긴 경치가, 중국 揚子江(양자강)에 있는 赤壁보다 더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산의 정상 부분이 큰 항아리를 뒤집어 높은 모습이라고 하여 甕城山(옹성산)이란 이름이 붙은 바위 절벽이 동복호에 잠긴 모습이 絶景이다,

화순 적벽화순 적벽


그런 아름다움이 볼 수 있기에는 아픔도 있었다. 바로 동복호를 만들면서 15개 마을이 물에 잠겨 고향을 버리고 이주해야만 했던 것이다. 石林(석림) 滄浪(창랑) 勿染(물염) 長月(장월) 등이 그런 마을들이다. 적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는 望鄕亭(망향정)을 지어, 이주민들이 1년에 한 번씩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망향정 한켠에는 水沒(물에 잡긴)된 마을들의 이름과 그 내력을 적은 비석들이 서 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마을 이름이 있다. 獐項(장항)마을과 卵山(란산)마을이다. 獐項의 장은 노루 장이고, 항은 목 항이다. 卵山의 란은 달걀이고 산은 뫼이다. 그러니 장항마을은 노루목마을을, 란산마을은 알메골을 각각 한자로 옮긴 것이다. 언제 한자로 옮겼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으나, 아마도 日帝 강점기 때 일본이 행정편의를 위해 일본식 한자로 바꾼 것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獐項里을 장항마을로, 卵山里를 난산마을로 표기할 때 발생한다. 獐項을 그냥 장항으로 표기하면, 원래 뜻이 노루목이라는 것을 절대로 알 수 없는 하나의 (발음)기호에 불과하게 된다. 노루목이라는 역사와 문화를 가진 마을의 실체는 없어지고 ‘장항’이라는 기호만 남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長項線(장항선)의 종점인 충청남도 長項의 장항과 헷갈리게 된다.



卵山里을 난산리라고 표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卵山里를 한글로 표기하려면 난산리가 아니라 알메골로 써야 한다. 그래야 옛날부터 거기에 살았던 사람과 책을 보는 사람도 알메골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배울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알메골이 卵山里로 됐다가 난산마을로 표기하고 나면 역사는 단절되고 만다. 난산마을이 알메골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현 세대들이 죽고 나면 알메골을 알 수 있는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潭陽(담양)의 錦城山城(금성산성)에 있는 輔國門(보국문)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輔國(보국)은 나라를 돕는다는 뜻으로, 崔濟愚(최제우)가 세운 ‘東學(동학)’이 내세운 創敎(창교)이념 가운데 하나다. 원래 최제우는 ‘나라를 보호한다’는 뜻의 ‘保國(보국)’이란 단어를 썼다.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保國安民(보국안민)’이 그것이다. 그런데 2대 동학 교주였던 崔時亨(최시형)이 保國을 輔國으로 바꿨다. 억울하게 교수형에 처해진 최제우 교주의 伸寃(신원, 원한을 풀어줌)운동에 도움이 되고, 동학에 대한 탄압을 줄여보기 위해 표현을 완화한 것이다.

그런데 그냥 ‘보국’이라고 쓰면, 保國인지 輔國인지 전혀 알 수 없다. 문맥에 따라 의미를 알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 경우는 문맥을 아무리 따져도 保國과 輔國을 구별할 수 없다. ‘ 글전용’의 한계다(한글전용이라는 말도 한글專用이 아니라 ‘ 글 오로지 쓰기’로 바꿔야 진짜 한글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나의 고향 이름은 뫼골이다. 뫼는 山이니 산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를 한자식으로 부르려다 보니 산곡(山谷) 묘곡(墓谷) 묘골 등으로 표기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어원을 따지면 뫼골이 맞는다. 이를 산곡이나 묘곡이라 부르고 쓰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語不成說, 어불성설)

노루목을 장항이라고 쓰고, 알메골을 난산마을이라 쓰고, 뫼골을 산곡이라고 표기하면 그 뜻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글 전용론자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하다.
장항이 노루목이라고? 장항선의 종점인 장항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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