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 속 빈곤'의 역설, 신종감염병 오면 속수무책

머니투데이 안정준 기자, 김지산 기자 2016.10.13 04:30
글자크기

지역 물량 제대로 반영 못한 백신 수요 예측 시스템…대책 마련 시급해

'풍요 속 빈곤'의 역설, 신종감염병 오면 속수무책


1년이 지났지만 독감백신 공급 불균형 문제는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65세 이상 어르신 독감백신 무료 접종이 10월1일 시작됐다. 접종 시작 1주일 만에 일부 지역에서 물량 조기소진 현상이 빚어졌다. 1주일이 더 지나자 백신을 보유한 전국 병원 수가 접종 시작 때의 절반으로 줄었다. 정부는 부랴부랴 보건소 비축 물량을 풀었지만 노인들의 불만을 해소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백신 '풍요 속 빈곤' 원인은 '쏠림현상'?=지난해에도 정부가 마련한 전체 백신 물량은 부족하지 않았다. 독감백신 접종 시즌인 2015년 10월부터 올해 1월까지 65세 이상 어르신 545만2984명이 정부 보유물량 범위 안에서 접종을 마쳤다.



정부는 지난해 특정 지역에서 발생한 물량 조기소진의 원인으로 접종 초반 '쏠림 현상'을 지목했다.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는 "지난해 접종 시작에 앞서 전체 보유물량의 60%를 일선 병원에 공급했고 나머지 40%를 보건소에 비축해 뒀다"며 "초반에 접종자들이 몰려 60%의 물량이 예상보다 빨리 소진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정부가 올해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 '연령별 접종시점 구분'이다. 올해는 75세 이상 어르신 접종을 지난 4일 우선 시작하고 10일에는 65세 이상 접종을 개시했다. 접종 시차를 둬 초반 쏠림을 막겠다는 것이다. 일선병원 공급비중도 80~90%로 늘리고 접종이 가능한 지정의료기관도 지난해 1만5000곳에서 1만7000곳으로 확대했다.



◇올해 또다시 실패한 백신 수요예측=그럼에도 접종 개시 7일 만에 지난해와 똑같이 물량 조기 소진 지역이 속출했다. 의료전문가들은 초반 쏠림현상 외에 정부의 지역별 백신 수요예측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지역별로 전년도 실제 접종 건수와 노인 인구수 두 개 요소를 축으로 수요 예측을 진행한다. 1년 사이 지역별 노인 인구에 급격한 변화가 생기기는 힘들다는 판단에서다. 이렇게 지역별로 분배된 물량은 보건소를 통해 지역 병원에 다시 배분된다.

하지만 이 같은 수요 예측 과정에서 실제 병원 요청 수량은 사실상 반영되지 않는다.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는 "병원 요청 물량은 수요 예측에 참고사항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요청 수량에 훨씬 못 미치는 물량을 받은 병원이 많다. 서울 A내과 관계자는 "지난해 초반 백신 접종 수요가 많아 올해는 넉넉하게 250개를 요청했지만 받은 것은 지난해 수준인 160개였다"며 "11일 현재 남아있는 물량은 10개 뿐"이라고 말했다. 조기 물량 소진이 발생한 병원 대부분은 요청 수량보다 적은 물량을 공급받은 곳이었다.

보건소 비축 물량이 동이나 조기 물량 소진이 발생한 병원이 추가 공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도 생긴다. 대구 남구 보건소 관계자는 "이미 비축분이 모두 소진된 상태"라며 "물량 부족 병원에는 인근의 재고가 있는 병원에서 추가분을 받도록 안내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 보건소에 대한 수요예측 자체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정부의 지역별 잔여 백신물량 파악 시스템에도 허점이 보인다. 질병관리본부는 '예방접종도우미 사이트'에 현재 접종 가능한 병원과 병원별 잔여 백신 물량을 업데이트하고 관리한다.

질병관리본부는 '재고 상황이 실시간으로 반영된다'고 설명했지만 잔여 수량 20개 미만으로 표시된 병원 중 상당수는 아예 물량이 없다. 12일 기준으로 '예방접종도우미 사이트'에 표시된 접종 가능 병원 수는 모두 1만5834곳. 이 가운데 일부는 '허수'인 셈이다.

◇신종감염병 '팬더믹(대유행)' 발생하면 속수무책=정확한 지역별 수요 예측 시스템 부재는 독감을 넘어서는 치명적 감염병 유입 시 문제를 키울 수 있다고 의료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백신이나 치료제가 있다 하더라도 수급 불균형 탓에 제때 대응을 못하는 지역이 속출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2009년 신종플루 유행 당시에도 관련 백신 공급의 지역별 편차가 지적된 바 있었다. 당시 정부는 전국 백신 위탁의료기관 3708곳을 선정했는데, 경기도(907곳)와 서울(548곳), 인천(395곳) 등 수도권에 51%가 편중됐었다. 이에 반해 광주와 대전, 울산, 제주 등 4개 광역시 위탁의료기관은 총 194곳으로 전체 5.2%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해당 지역 취약계층이 백신을 접종받는데 어려움이 생겼다.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독감 백신은 물량 자체는 부족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다수의 생명이 위험해지는 심각한 상황까지 발생할 우려는 없다"며 "하지만, 다른 팬더믹(대유행)의 경우 정확한 수요 예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백신 물량 자체를 사전에 여유있게 확보해 일선 보건소와 병원에 미리 배분해 두면, 지역별 수요 예측이 빗나가더라도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조성일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는 "정확한 수요 예측 법을 강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예측이 빗나갈 경우에 대비를 해야 한다"며 "예산을 아까워하지 말고 사전에 백신을 충분히 마련하는 '재난 투자'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