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도 교수]"북한 새 정권 설 수 있게 도와야"

더리더 편승민 기자 2016.08.08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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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한반도 통일은 체제의 흡수 아닌 공존

북한 고위층 인사들의 탈북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들의 탈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탈북의 원인에는 독재에 대한 불신, 신변의 위협에 따른 탈출 등이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북한 최고지도자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고위인사들이 정부에 등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1994년 탈북한 강명도 교수 역시 과거 북한 상위 0.1%의 초엘리트 인사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김일성 시대에 서열 3위였던 강성산 전 총리의 사위로도 유명하다.
강명도 교수는 김일성부터 김정은에 이르기까지 북한의 3대 독재 세습정치의 힘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과의 개방과 교류 없이는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며, 이미 시장경제와 문화의 문이 열렸다고 판단했다.

[강명도 교수]"북한 새 정권 설 수 있게 도와야"


통일에 대해 묻자 그는 “지금 당장 흡수통일이 이뤄진다고 해도 하늘과 땅 차이의 이념이 존재하는 한, 통일은 아무런 미가 없다. 우선 북한이 중국과 같은 개방을 통해 사회·경제적 발전을 이루면서 한국과 서로의 체제를 존중해 나가야 통일은 자연스럽게 다가올 것”이라고 답했다. 북한 고위층으로서의 삶을 살아온 그의 눈에 비친 북한과 한국, 그리고 하나된 한반도에 대해 들어봤다.



북한 상위 1% 고위 간부 출신인데 탈북을 감행한 이유가 궁금하다
▶1993년 3월, 북한의 1차 핵위기*가 터졌고 나는 그 다음해인 1994년 한국에 왔다. 1990년대 북한의 상황은 지금보다도 좋지 않았다. 동구권(과거 동유럽과 중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소련이 1991년 붕괴됐고, 중국은 1992년 한국과 수교하면서 북한과 멀어졌다. 이로써 북한의 경제상황이 악화됐다. 김일성은 이런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김정일을 경질하고 자기가 직접 정치 전면에 나섰다. 그리고 1992년 12월, 최고인민위원회를 갑작스럽게 소집해 자기 사람들(강성산, 이성대 경제위원장 등)로 경제파트를 꾸렸다. 내 장인(강성산)이 그때 함경북도당 책임비서였다가 최고인민위원회에서 총리로 임명 받았다.
이렇게 김일성이 전면에 나설 만큼 북한이 경제적·정치적·국제적으로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의 많은 고위층은 사회주의는 북한만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마저도 국제사회가 핵문제를 제기해 북한을 말살하려는 말살정책의 하나로 보고 핵으로 대응한 것이다. 그때 북한은 플래티늄을 무작위로 추출하고 방사화학실험실에서 플래티늄을 재처리하기 시작했다. 이를 국제원자력기구 감시위원들이 포착하고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북한은 그것보다도 미국이 북한마저 압살하기 위해 핵카드를 꺼냈다고 생각했다.
그런 과정에서 94년 초 김일성과 김정일 자녀들이 스위스로 이동하고, 친척들도 대피시켰다. 사실 나도 이 상태에서 북한이 무너지면 북한 고위층은 다 죽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미국이 공격하면 북한도 반격하지 않겠는가. 거기에 맞서 싸우면 전쟁이 날 텐데, 북한이 망할 게 뻔했다. 북한 고위층 중 북한이 이길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되면 한국과 미국이 북한을 접수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다 죽는 줄로 알았다.
전쟁에서 질건 뻔한데 김일성·김정일은 망명준비를 다 해놓고 가족들도 대피시킨 상황에서 미국이 공격하면 맞서싸우라고 할게 뻔했다. 그래서 난 유사시 가족들이 대피할 기지가 중국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중국에 피난처 겸 기지를 만들기 위해 나왔다. 그런데 당시 무역대표단으로 출장을 왔기 때문에 기간을 지키고 돌아가야 했는데, 일을 하다 보니 기간을 어겼다. 그때는 전쟁을 앞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일을 어기면 절대 안 됐다. 그런데 그 당시 내 장인이 총리이지 않았는가. 높은 고위층 관계자가 나가 있다고 여긴 김정일이 국가안전보위부 체포단 150명을 파견해 나를 잡아오라고 명령해 쫓기는 신세가 됐고 이럴 바에는 떠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해 한국으로 왔다.
* 1차 핵위기 :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1992년 북한 핵개발 의혹을 제기하면서 특별조사를 요구했다. 북한은 이에 응하지 않고 한미군사훈련이 시작되자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북한 고위층으로서 남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나
▶한국에 대해선 전혀 몰랐다. 북한보다 잘 살긴 하지만 미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도움을 받아서 잘 사는 것일 뿐 그다지 잘 산다는 생각을 안 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은 군사정권을 이어오다가 김영삼 정권으로 갓 바뀐 초기였다. 김영삼 정권도 기존의 전두환·노태우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암흑사회라고 봤다. 즉, 부정이 승리하고 정의가 늘 실패하는 사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탈북자들이 가면 다 정치범으로 몰아서 죽이는 줄만 알았다. 따라서 처음에는 한국에 바로 오지 않고 미국으로 가려고 했다가 독일로 먼저 갔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많은 사람이 한국에 대해 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잘 모르는 게 현실이다.
당시에는 한국을 적대적으로만 생각했다. 북한은 공식적으로는 남북이 한민족으로서 통일해서 함께 나아가자는 고려연방제 통일* 발언을 했다. 그러나 실제 북한주민에게 교육하기로는 남조선을 해방시킨다는 식으로 말한다. 항상 남조선 정권을 때려 부수고 해방시킨다는 개념이지, 같이 더불어 산다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반인도 ‘한국’하면 적대적으로 생각했지 민족공동체로서 같이 살아가자는 말을 할 엄두도 못 냈다. 그때는 지금처럼 한류바람도 없었고 한국에 대해 알만한 통로도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다.
* 고려연방제 통일 : 북한이 주장하는 공식적인 통일 방안으로, 남북이 현재 가지고 있는 사상·제도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연방국가의 형태로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다.



혁명운동사적관의 김일성·김정일 밀랍인형(노동신문)혁명운동사적관의 김일성·김정일 밀랍인형(노동신문)
그렇다면 북한의 통일에 대한 입장은 그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인가
▶북한이 주장하는 남조선 해방을 통한 통일이라는 말은, 아직도 남조선을 미국의 식민지로 보는 것이다. 마치 일제 해방과 똑같이 보는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했는데 김일성이 북한을 해방시켰고 남조선은 아직 해방되지 못했다는 식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93~1994년 북한에 위기가 오면서 사회주의 해방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남한에 의해 북한이 흡수통일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언젠가는 미국과 한국이 우릴 치겠구나, 무너뜨리겠구나.’ 하는 강박관념과 불안감이 있었다. 김정일도 불안했기 때문에 자녀들을 스위스로 보낸 것이다. 그런 불안감이 아니었다면 세습정권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자녀들을 북한에서 교육했을 것이다. 그렇게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으면서 김정일도 정권을 포기할 시점이 왔다는 생각까지 했다. 이후 북한이 다시 기사회생했지만 말이다.

북한이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것이 남한과의 교류 때문이었나
▶그동안 폐쇄적인 사회였던 북한은 점차 한국과 교류하면서 1998년, 1999년 그리고 특히 2000년 정상회담으로 남북교류협력을 통해 한국에 대해 알게 됐다. 따라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무조건 나쁘게 평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햇볕정책을 통해 많이 지원하다 보니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고, 환상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위층과 일반주민 모두 그랬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면서 많은 사람이 남조선이 적대적인 원수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교류도 있었다. 이런 것들을 통해 한국에 대해 다시 알게 된 것이다.
일부에서는 다 죽어가는 김정일 정권을 퍼주기 식으로 지원해줌으로써 살려놨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도와주지 않았으면 그 정권이 죽었을까. 그렇지 않다. 더 고통받고 힘들었겠지만, 독재정권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독재정권을 타도할만한 세력이 있었으면 황장엽 선생이 한국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시 김정일 정권은 선군정치를 하면서 2만5000명을 죽였다. 더 이상 김정일 정권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해 한국으로 온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도와줌으로써 먹고 살만해지면서 한국에 대한 환상이 생기고 한국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햇볕정책이 독재정권을 잇게 한 점이 있지만, 그 이면에는 북한 주민들을 살려준 측면도 있다고 본다.

최근 북한 내에서 한국문화 콘텐츠 보유에 대한 처벌 수위가 더 높아졌다고 하던데
▶북한이 최근 형법 두 조항을 추가했다. 하나는 일명 ‘황색물’이라고 해 자본주의 영상물이나 책자를 유통하는 자를 징역 20년 내지 총살형에 처한다고 했다. 북한의 형법에는 총살이 있다. 또 한 가지는 한국과 내통하는 자, 즉 전화하거나 한국으로부터 물건을 받는 등 한국에 대해 선전하는 자는 20년 징역에 처한다는 조항이 추가됐다.
김정일 정권 때는 압록강과 두만강에 철조망이 없었는데 김정은 정권이 시작되면서 철조망이 생겼다. 왜 그럴까. 지금까지 북한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들을 거치면서 한국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또 그동안 한국에 온 탈북자가 약 3만명이나 되다 보니 이들을 통해 한국사회가 알려지면서 더 많은 사람이 탈북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면 정권이 멸망할 수 있다고 판단돼 더욱 강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독재 세습정권이 3대까지 내려오면서 가치중심은 점점 희석되고 있다. 김일성은 카리스마있는 신적인 존재였는데 김정일 때부터 약화됐고, 김정은 정권에는 더 약해졌다. 따라서 공포정치, 숙청정치를 강화하지 않으면 정권을 유지할 수 없고, 정치적 기반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김일성이 카리스마와 인품으로 북한을 다스렸다면, 김정은은 총살과 공포정치와 숙청으로 다스리고 있다. 이렇게 한국을 차단하고 한국의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은데 이미 늦었다고 본다.


北 김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 추대(노동신문)北 김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 추대(노동신문)
남한 흡수통일의 경우 가장 큰 문제로 꼽히는 점은 아무래도 경제적인 격차다. 북한이 지난해부터 자율경영제를 도입한다고 했는데, 북한 시장경제의 수준은 어떤가
▶북한식 자율경제라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됐다. 공장·기업소에서 중앙에 물건을 공급하면 북한 노동자들에게 봉급을 주고 배급을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북한에 11개의 직할시와 도가 있다고 하면 도당 책임자, 시 책임자들에게 과업을 주고 있다. 각 도의 공급과 배분은 각자가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위에서 김정은이 알아서 하라고 하면, 시도 책임자들은 생산단위인 리에 알아서 생산하고 50%만 가져오라는 식이다. 이를테면 연필 만드는 공장의 경우 과거에는 연필만 생산해서 중앙에 보급하면 봉급과 배급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사지 않는다. 그래서 잘 팔리는 물건을 만들어 장마당을 통해 판매해 생활을 하지 중앙에서 보급받지 않는다. 중앙배급소가 아니라 이제 공장에서 배급을 주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잘되고, 잘 안 되는 공장이 각각 생기게 마련이고, 그렇게 북한식 시장경제가 시작된 것이다. 이미 북한식 계획경제는 무너지고 북한식 시장경제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북한주민의 국가의존도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

이번 사드 배치에 대해 어떻게 보나
▶사드를 배치하면 한반도만 보는 게 아니라 중국도 볼 수 있다. 즉, 중국에서 일어나는 미사일 발사 움직임까지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이 강하게 반대한 것이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사드 배치를 결정한 것은 조금 빠르지 않았나 생각한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토론하면서 1~2년 정도 두고 봐야 했다고 본다. 그렇게 해야 중국을 대북제재에 끌어들일 수 있고, 북한이 완전히 고립돼서 헤어나올 수 없을 텐데 이번 사드 배치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지금이 시기 적절하게 중국, 러시아와 공조할 수 있었던 때인데 그 효과가 날아가 버렸다.
미국에는 한국의 여론을 좀 안정시킬 때까지 사드 배치를 기다려달라고 해도 미국은 할말이 없다. 그렇게 하면서 중국에는 우리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공조가 없냐고 말할 명분이 있었는데 어느 때보다도 공조가 잘되던 러시아, 중국, 한·미·일이 잘하던 것을 깨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나라는 유사시 방어도 하지 못한다. 사드가 우리나라를 방어할 목적이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 사드는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인한 미국으로의 공격을 막기 위한 방어체계다. 정부의 고육지책이겠지만 너무 서두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강명도 교수]"북한 새 정권 설 수 있게 도와야"
그렇다면 남북한 통일의 미래는 어떻게 보는가
▶지금 당장의 통일보다는 남북교류협력을 통해 독재 세습체제를 타파하도록 도와주고, 타파되면 새로운 정권이 설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야 북한이 “아, 남조선이 우리를 집어 먹으려는 게 아니구나. 김정은 정권이 무너지면 새로운 정권이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구나”라고 여길 것이다. 그리고 중국처럼 개방하면서 시장경제로 나아가 국제협력교류를 하고 남북교류가 활성화 되면 북한도 크게 발전할 것 아닌가. 그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통일이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그것도 흡수하느냐, 흡수를 당하느냐가 아니라 연방제로 가면서 점차 하나로 합칠 수 있는 단계가 필요하다.
앞으로 이것만은 분명하다. 김정은 정권이 존재하는 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김일성, 김정일 같은 카리스마가 없기 때문에 핵을 보유하려고 할 것이다. 김정은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권이 탄생할 수 있도록, 기득권 세력이 새로운 세력을 창출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정부가 나서서 하지 못하면 자연스럽게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줘야 한다. 핵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인민을 위한 정권을 세울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우리가 도와주겠다. 대신 핵을 내려놓아라”라는 식으로 김정은과 모든 기득권을 분리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본다.

△ 강명도 교수
–– 1958년 12월 4일 북한 평양직할시 출생
––북한 평양외국어대 졸업
––북한 중앙사로청 과외교양지도국 외사과 지도원(1979~1982)
––북한 조선인민경비대원 평양시당지도원(1982~1985)
––북한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 국제부 지도원(1985~1986)
––북한 인민무력부 보위대학 보위전문 연구실장
–– 1994년 대한민국으로 탈북
––現 경민대 북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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