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책 제목인 '비단길'을 봤을 때 슬픈 이야기가 도사리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니나다를까 '비단길'에 놓인 일곱 개의 단편은 우리 한국의 역사적 사건 6.25 전쟁과 맞닿아 있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이념과 피의 전쟁, 민족과 혈연이 얽히고설킨 문제들이 이야기를 끌어안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한국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 책에서는 개인의 아픔이 결국은 우리 사회에 깔린 상처였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철학공부를 한 형은 어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했지만 이념차이로 인해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는 있었다. 그리고 '나'가 가장 궁금한 건 형이 메고 있던 군용 백이었다. 그러나 집에서도 군용 백에 담긴 물건을 풀지 않았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운명에 대해 묵시적으로 암시하는 기회가 한 번쯤은 있다"고. 부모님은 이미 형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얼마나 끔찍한 예감인가. 자식의 죽음을 예견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니. 한 개인의 죽음은 결국 우리 사회의 아픔이자 상처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비단길'은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김영환씨 가족의 이야기이다. 김영환씨 가족은 대한적십자사에서는 6.25 전쟁 때 납북한 이산가족으로 등록됐고 연고제로 인해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면서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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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 이유로 이산가족상봉 대열에 들어가게 되었다. 북에 있는 아버지가 만남을 제의한 것이다. 어머니를 비롯한 고모와 아들 영환씨, 손자 선재씨가 상봉 자리에 나가기로 한다.
드디어 가족이 만나는 자리. 그러나 아버지 앞에서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저 음식을 남편 앞으로 밀어 넣을 뿐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헤어지고 돌아온 어머니는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고 만다. "이 길로 임자 따라나서서, 쌀밥에 고기반찬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이 애절한 절규가 담긴 말을 끝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 이야기는 뒤에 오는 '기다린 세월', '울산댁'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어진다. 언제 돌아올지, 생사를 모르는 하염없는 기다림. 그 세월을 눈물과 한으로 살아내야 했던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들의 가슴팍이 문장마다 새겨져 있다. 바늘로 찌르듯이 아픈 가슴을 내내 쥐어 안고 살아왔던 세월이다.
전쟁을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로 기억하는 때가 올 것이다. ‘비단길’을 통해 전쟁이 얼마나 우리 삶에 황폐와 슬픔을 불러오는지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 비단길= 김원일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278쪽/1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