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할 때 버퍼링 걸리는데"…"조금 기다리면 되지"

머니투데이 박다해 기자 2016.07.25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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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비장애인 배우 함께 서는 창작뮤지컬 '배우수업'…29~30일 서울 노량진 CTS아트홀

장애인 배우 길별은씨는 어렸을 때부터 배우를 꿈꿨다. 우연한 기회에 서울예술단 오디션에 통과, '크리스마스 캐롤'로 정식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사진=김창현 기자장애인 배우 길별은씨는 어렸을 때부터 배우를 꿈꿨다. 우연한 기회에 서울예술단 오디션에 통과, '크리스마스 캐롤'로 정식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사진=김창현 기자


#장애인 배우 길별은(47)=세상의 공기를 처음 들이마셨을 때부터 나의 뇌는 조금 달랐다. ‘뇌병변 2급’ 판정. 어머니는 신체가 자유롭지 못한 나를 업고 종종 거리 구경에 나서곤 했다. 어머니 등에 업혀 극장에 처음 간 날, 꿈이 생겼다. 배우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무대 위라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무대에 서는 '나'를 그리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서 현실을 깨달았다. 장애 때문에, 배우는 못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연기의 매력이란…. 고등학교 3학년, 공부는 뒤로하고 영화관을 오가며 150편이 넘는 영화를 봤다. 졸업 후 ‘먹고 살 길’을 찾아 애니메이션을 배웠다. 손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나에게 섬세함을 요구하는 작업이 쉽진 않았다.



우연은 거짓말 같이 다가왔다. 지하철에서 ‘장애인 배우’ 오디션 공고를 발견했다. 모집 기간 마지막 날, 나는 ‘서울예술단’의 문을 두드렸다. 꿈은 운명이 됐다. 2003년 12월, 뮤지컬 ‘크리스마스 캐롤’로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무대에 섰다. ‘코카서스의 백묵원’으로 국립극장 무대에도 올랐다. 연극, 뮤지컬, 영화로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2014년 드라마 ‘갑동이’(tvN)와 ‘개과천선’(MBC)에도 얼굴을 비쳤다.

비장애인 배우 서광재씨는 성우 출신 연기자다. 연극판에서 30년이 넘는 내공을 쌓았다. 우연한 기회에 장애인 배우들에게 연기를 지도하는 봉사활동을 시작하며 길별은씨와 인연을 맺었다. /사진=김창현 기자비장애인 배우 서광재씨는 성우 출신 연기자다. 연극판에서 30년이 넘는 내공을 쌓았다. 우연한 기회에 장애인 배우들에게 연기를 지도하는 봉사활동을 시작하며 길별은씨와 인연을 맺었다. /사진=김창현 기자
#비장애인 배우 서광재(55)=연극판에서만 36년. 내공이 단단하다고들 한다. 성우로 활동하며 1992년 ‘KBS 방송대상 라디오 부문 신인 연기상’을 수상했다. 드라마나 영화 조연 경험도 많다.



내가 길별은을 알게 된 건 20년 만에 우연히 연락이 닿은 고향 친구를 통해서다. 지난해 초, 친구의 소개로 장애인 배우의 연기를 지도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동료 배우로 같은 무대에 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이 서는 공연은 이따금 있었지만 장애인 배우의 비중은 극히 적었다. 장애인 배우를 전면에 내세우는 극을 만들고 싶었다. 연기를 가르치며 ‘이 정도 실력이면 주인공도 괜찮을텐데…’ 싶었다. 덥석 연출을 맡았다.

처음엔 간소하게 올리고자 했다. 대본을 만들고 수정하는 과정에서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자’는 욕심이 생겼다. 외부에서 연출을 섭외했고 나는 전공 연기로 돌아왔다.

창작뮤지컬 '배우수업'의 배우 서광재(왼쪽)씨와 길별은씨는 "8살이나 차이나지만 서로 친구가 됐다"며 환하게 웃는다. /사진=김창현 기자창작뮤지컬 '배우수업'의 배우 서광재(왼쪽)씨와 길별은씨는 "8살이나 차이나지만 서로 친구가 됐다"며 환하게 웃는다. /사진=김창현 기자
"보편적인 사람들도 다 장애…순수한 마음까지 장애로 치부하지 말자"


뮤지컬 ‘배우수업’에는 다운증후군, 뇌병변, 모자이크 다운증후군을 지닌 배우와 비장애인 배우들이 함께 무대에 선다.

무명 배우 생활을 하며 장애를 가진 아들을 홀로 키워오던 아버지가 시한부 암 판정을 받은 뒤 혼자 살아가야 하는 아들을 위해 역할극을 한다는 내용이다. 세상과 맞서는 훈련을 시키고 싶어하는 아버지와 이를 어려워하는 아들의 갈등이다. 그러나 너무 무겁지 않고 유쾌하다. 배우 길별은, 서광재는 입을 모아 말했다. “나만 잘하면 된다”고.

“언어장애에 음치, 박치 다 큰일이죠. (뇌병변으로) 말할 때 ‘버퍼링’이 걸려요. 대사는 그나마 괜찮은데 노래는 그게 아니잖아요. 음악이랑 맞춰야 하는데 걱정이죠.” (길별은)

“저도 음치, 박치인데 솔로 곡에 듀엣곡까지 있으니 기가 막히죠. 하하 (웃음) 저만 잘하면 돼요, 정말로. 조금만 연습에 늦으면 다운증후군 친구한테 ‘열심히 좀 하라’고 혼나요.”(서광재)

길별은이 서광재를 따르는 건 그의 장애를 ‘교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종종 ‘장애인이 아닌 척’ 연기를 해야 한다는 주문을 받는다. 하지만 서광재는 그의 대사 ‘버퍼링’도, 대사암기가 어려운 부분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여느 배우와 똑같이 대하면서 장애는 하나의 특성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길별은은 서광재에게 연기를 배우는 일이 즐겁다. 장애인 배우들 모두 서광재가 오는 날을 기다린다.

서광재는 길별은에게 배운다. “장애가 있는 친구들에게 ‘핸디캡’이 없다고 하면 어폐가 있지만, 분명한 건 그 점 때문에 훨씬 더 내면이 깊다는 거예요. 언어장애가 있다면, 단지 조금 기다려주면 되죠.”

기존 배우들에게서 접할 수 없는 새로운 시각과 접근법을 깨닫게 해준다. 자신을 겁나게 만드는 친구들이 스스로 끊임없이 노력하도록 자극을 준다.

“보편적인 사람들도 다 장애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다만 별은씨 같은 친구들은 외형적으로 드러날 뿐인 거죠. (다른 사람들은) 자기 안의 장애는 생각 안 하고 드러나는 부분만 갖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장애라는 걸 그들의 특성으로 이해해야 하는데…”(서광재)

막이 오르기까지 남은 시간은 5일 남짓. 대사, 노래, 안무, 동선을 익히는 일이 어려워도 연습은 설렌다. 이들은 최소 1년에 한 편씩 장애·비장애인 배우가 함께 서는 창작극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우리가 가진 편견 때문에 그들이 가진 순수한 마음마저 장애로 치부해버리는 건 굉장히 안타까워요. 많은 분이 공연을 보러 오셔서 같은 ‘사람 대 사람’으로 바라보고 공감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서광재)

이번 공연은 이대영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가 연출을 맡았다. 강민휘(다운증후군 3급), 길별은(뇌병변 2급), 권혁준(모자이크 다운증후군) 배우와 이지형, 서광재, 이예빈, 류지광 배우가 함께 무대에 선다. 29~30일 서울 노량진 CTS아트홀에서 막을 연다. 총 4회 공연으로 무료다. 02-325-9933

배우 길별은(왼쪽)씨와 서광재씨가 참여하는 뮤지컬 '배우수업'은 다음 달 29~30일 서울 노량진 CTS아트홀에서 무료로 4회 공연된다. /사진=김창현 기자배우 길별은(왼쪽)씨와 서광재씨가 참여하는 뮤지컬 '배우수업'은 다음 달 29~30일 서울 노량진 CTS아트홀에서 무료로 4회 공연된다. /사진=김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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