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UN)은 이를 기념해 100주년이 되는 2005년을 ‘세계 물리의 해’로 지정했다. 작년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 100주년이 되는 해로 많은 행사가 있었다. 그 백미는 영화 ‘인터스텔라’가 아니었을까싶다. 일반상대성이론이 예측하는 결과 가운데 하나인 중력파의 발견으로 과학계는 아직도 들떠있다. 이 모든 것이 아인슈타인이라는 한 과학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위대한 과학자였지만, 한 인간으로서도 많은 이들의 흠모를 받았다. 특히, 그의 소탈한 성품은 항상 화제였다. 헝클어진 머리, 수수한 옷차림, 옷깃에 찔러 넣은 펜,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표정. 하지만 전쟁과 핵무기, 빈부격차, 인종차별 등에 분명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용감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말은 어록이 되어 책으로 출판되었을 정도다.
작년 필자는 ‘교육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독립’이라는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행복은 주관적인 것이다. 행복이 무엇인지는 아이가 독립한 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의미로 한 말이다. 아인슈타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독립할 뿐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것을 가장 고귀한 것으로 여기라는 것이다. 이 표현에는 미묘한 것이 있다. 공동체를 위해 살라고만 한 것은 아니다. 본인이 이런저런 이유로 그렇게 살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으라는 말이다. 그러면 그것을 실천하는 다른 이를 볼 때, 적어도 그를 존경하게 될 것이다.
“선생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것은 지식과 이해 자체가 아니라, 지식과 이해에 대한 갈망, 그리고 예술, 과학, 도덕 같은 모든 지적 가치를 음미하는 능력이다.” 정보화 시대에 이 말은 더욱 깊이 있게 다가온다. 지식은 인터넷에 다 있다. 인간이 할 일은 이것들의 가치를 음미하는 능력이다. 사실 지적 가치를 갈망하고 음미할 줄 아는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쉬면서 하라고 말려야 할 거다. 대학입시 핑계는 그만하자.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 무엇이 옳은지는 다른 문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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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아인슈타인이 생각하는 가르침의 참모습이다. “가르침이란 상대가 그것을 귀중한 선물로 여겨야 하지 고된 의무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지난 1년간 머니투데이에 칼럼을 연재해 왔다. 나에게는 때로 고된 의무였지만, 독자들이 그것을 귀중한 선물로 여겼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