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만큼 '빛난' 청운동 투표소의 유권자들

머니투데이 김민중 기자 2016.04.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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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여담]

박근혜 대통령이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날인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의 서울농학교를 찾아 투표하고 있다. /사진제공=청와대박근혜 대통령이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날인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의 서울농학교를 찾아 투표하고 있다. /사진제공=청와대


#지난 13일 오전 8시30분. 서울 종로구 청운동의 서울농학교. 한 어르신이 오르막길을 오릅니다. 힘이 부치시는지 중간에 주저앉습니다. 손부채를 부치며 "투표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인갑네"라고 말합니다. 잠시 후 일어나 또 다시 오르막을 오릅니다. 가다서다를 반복하기 몇 차례, 기어코 투표를 마칩니다.

#오전 10시 같은 장소. 김미정씨(87)가 딸의 손을 부여잡고 나타났습니다. 투표소에 들어가기 전 기자에게 "1945년 해방 이후 치러진 대선, 총선 등 선거에서 한 번도 빠짐없이 투표했다"며 "국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전했습니다.



#오후 5시. 시각장애인(전맹) 이연경씨(26)는 지팡이로 땅을 더듬으며 들어옵니다. 투표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으로 보고 그때까지 종일 집에서 쉬다가 비교적 한적할 듯한 시간대를 택해 나왔다고 합니다. 수십 분에 걸쳐 투표를 한 뒤 말합니다. "시각장애인도 국민이니까 투표해야죠."

#오후 5시59분. 투표 마감을 1분 남기고 학교 정문 앞에 택시가 끼익 멈춥니다. 신디킴씨(37)가 내리고 투표소로 전력질주 합니다. 안내원은 "이분까지, 이분까지"라며 안심시킵니다. 투표를 마친 그는 숨을 고른 뒤 "해외에서 줄곧 유학 생활을 해 왔고, 곧바로 주재원으로 일해온 탓에 이번이 내 인생 첫 투표"라며 "하마터면 못 할 뻔했는데 다행"이라고 합니다. 이윽고 투표소 문이 닫힙니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날 박근혜 대통령의 투표 장면을 취재하러 찾아간 청운동 투표소에서 마주한 유권자들입니다. 삼엄한 경계와 주변의 관심 속에 대통령이 투표를 마친 후에도 이곳에는 남녀노소, 장애인과 비장애인 구분 없이 많은 유권자들이 찾아와 대통령과 똑같은 한 표씩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놀라운 열정들을 보여줬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민주주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아 가슴 한 구석이 뭉클했습니다.

하지만 이 감동은 머지 않아 다소 잦아들었습니다. 전국 최종 투표율이 58%인 것으로 집계됐기 때문입니다. 이전 총선 때(54.2%)보다 많이 높아졌다지만 여전히 60%에 미치지 못하는 저조한 수치임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흔히 '선진국은 투표율이 낮은 게 당연하다'는 편견도 있지만, OECD 평균 투표율(2011년 기준) 70%를 넘는다는 걸 고려하면 우리의 58%는 더 초라해 보입니다. 그나마 2030 세대의 투표율이 이전보다 눈에 띄게 높아졌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아야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헬조선'(지옥을 뜻하는 '헬'과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조선'을 합한 신조어)이라는 좋지 않은 별명을 얻었습니다. 한 마디로 여기선 먹고 살기 힘든데 개선될 희망도 없다는 겁니다. 어느 때보다도 세상을 바꿀 정치의 중요성이 커진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정치인을 뽑는 투표에 그리 큰 관심을 갖지 않는 모양입니다. 현재와 미래를 비관하면서 바꿀 의지도 부족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설상가상입니다.


혹시나 이게 "정치인은 그 X이 그 X이라 누굴 뽑든 세상은 안 바뀔 것"이라는 체념의 결과라면, 멀리 갈 것도 없이 1985년 실시된 우리나라의 12대 총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투표율은 84.6%로 높았습니다. 이는 군부 독재 시대를 마감하고 민주주의 시대를 여는 시금석이 됐습니다. 당장 내년에 있을 대선부터는 투표율이 치솟길 기대합니다. 헬조선을 끝내는 첫 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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