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300]우린 왜 필리버스터 전에 테러방지법을 몰랐을까

머니투데이 박소연 기자 2016.03.06 15:52
글자크기

[the300]수개월간 '쟁점법안' 논의에도 "테러 막자는데 왜 반대하나"→필리버스터 후 여론 '급반전'…평소 입법활동 관심 절실

테러방지법의 본회의 표결을 저지하기 위한 야권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가 2일 마무리됐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지난달 23일 ‘국가 비상사태’를 이유로 새누리당이 제출한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한지 9일 만이다. 9일동안 38명의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 단상에서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를 진행했다. /사진=뉴스1테러방지법의 본회의 표결을 저지하기 위한 야권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가 2일 마무리됐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지난달 23일 ‘국가 비상사태’를 이유로 새누리당이 제출한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한지 9일 만이다. 9일동안 38명의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 단상에서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를 진행했다. /사진=뉴스1


지난달 23일부터 지난 2일까지 192시간 26분간 세계 최장 시간 이어진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는 숱한 화제를 뿌렸다. 발언대에 오른 의원들의 이름이 인터넷 포털 검색어에 오르며 인기를 얻었고 각종 어록이 회자됐다. 정치권에 대한 시민들의 뜨거운 참여와 관심으로 '민주주의의 재발견'이란 칭송도 따라붙었다. 그러나 이런 의문을 갖는 이는 드물어 보인다. 우린 왜 '테러방지법'에 진작 관심을 갖지 않았을까?

테러방지법안은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1년 미국 9.11 테러 발생 이후 정부안으로 발의된 게 최초다.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꾸준히 발의됐지만 항상 국정원의 권한 남용 우려와 인권침해 등 논란으로 임기만료 폐기됐다.



19대 후반기 국회 들어 테러방지법은 '쟁점 법안'으로 집중 논의됐다. 지난해 10월 정보위 국감에서 국내 IS(이슬람국가) 동조자와 북한의 국회 사이버해킹 시도가 알려지고 해외 IS조직에 가담한 '김군'의 행적이 보고됐고 11월 프랑스 파리 테러가 발생하자 관심 법안으로 급부상했다.

11월18일 정보위 긴급 현안보고를 시작으로 같은 달 27일과 30일 법안소위가 열렸다. 2년만의 법안소위였다. 여야는 '국정원 역할과 권한'을 놓고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다. 당시 정보위 소속이었던 새정치연합 문병호 의원이 테러방지법으로 권한이 강화될 국정원을 국회가 감시하도록 하는 '국회법 개정안' 발의해 함께 처리하자고 했으나 여당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임위 논의가 한창인 가운데 지난해 12월2일 새벽 여야 원내지도부는 2016년 예산안 처리과정에서 테러방지법을 정기국회 내 처리한다고 합의했다. 이번 필리버스터 첫 주자였던 정보위 소속 김광진 의원은 당시 페이스북에 "날벼락이다. 국정원을 감시할 대안 없이 날림으로 법을 만들 수 없다"고 반발했다.

이 때 여론은 어땠을까? '테러 막자는데 왜 반대하나'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이 때 법안은 최근 본회의를 통과한 여당의 수정안보다 일부 항목에서 국정원의 권한이 더 컸다. 이병석 새누리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이 법안은 국무총리가 아닌 국가정보원장 소속으로 테러통합대응센터를 설치토록 했고 국정원을 통제하는 기구도, 대테러 조사시 국무총리에게 사전·사후 보고 절차도 없었다.

당시 정의회 국회의장이 쟁점법안의 직권상정을 거부하면서 테러방지법의 정기국회 내 처리는 불발됐다. 임시국회 들어 서비스발전기본법, 노동5법에 밀려 논의가 주춤하던 테러방지법은 지난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과 터키 이스탄불 테러 등을 계기로 박근혜 대통령의 관심법안으로 언급되며 논의가 재개됐다.


국회 정보위원회 새정치민주연합 문병호(오른쪽), 김광진 의원이 지난해 12월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테러방지법' 및 '사이버테러방지법'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국회 정보위원회 새정치민주연합 문병호(오른쪽), 김광진 의원이 지난해 12월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테러방지법' 및 '사이버테러방지법'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여야 원내지도부는 테러방지법을 놓고 지난 1월부터 수차례 협상을 벌였지만 테러방지법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뜻미지근했다. 쟁점은 '정보수집권'이었다. 여당은 국정원에 금융정보 등 개인정보 수집권을 부여해야 전문성을 살릴 수 있다고 했고 야당은 국정원의 신뢰하락을 감안할 때 국민 기본권 제한 우려가 높아 국민안전처에 줘야 한다며 '절대 불가'로 맞섰다. 이 같은 이유로 '테러방지법 타결 실패' 기사를 쓰면 쟁점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국회 해산해라'라는 댓글이 주로 달렸다. 소수의 시민단체만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 18일 당정협의에서 '김정은이 남한에 대한 대테러 역량을 결집하라고 지시했다'는 국정원발 보고가 발표되자 즉각 청와대에서 테러방지법 제정을 촉구했다. 이는 정 의장의 직권상정으로 이어졌다.

지난해부터 정보위를 가까이서 지켜봐온 기자는 그렇기에 이번 필리버스터에서의 폭발적인 관심이 의외였다.

단 20여분의 준비시간이 허용된 김광진 의원은 첫 주자로 나서 안정적으로 발언을 이어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록(5시간19분)을 깬 것도 화제가 됐지만 오랜 정보위 활동으로 인한 폭넓은 정보 전달도 화제였다. 국정원의 역할과 지위 남용 사례, 국가대테러정책회의 등 그의 발언 대부분은 그가 몇 달 간 회의나 기자회견상에서 말했던 것들인데 이제야 국민에게 전달된 것이다.



물론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38명의 야당 의원들이 모두 테러방지법에 대해 정확한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국정원이 영장 없이 국민의 전화, 카톡, 이메일을 감청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고등법원 수석판사에게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 물론 문제의 여지는 남는다. 사법연감에 따르면 통상 구속영장 청구 기각률은 23%인데 최근 5년간 통신감청 영장 기각률은 4%에 불과해 사실상 국정원이 테러 위험인물이라며 신청한 영장이 기각될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필리버스터가 진행되는 동안 테러방지법에 대한 진실공방이 이어졌다. 지난달 27일 정보위 여당 간사인 이철우 의원이 '새누리당 테러방지법 오해와 진실 Q&A'를 배포했고 시민단체가 '반박문'을 냈으며 이 의원측이 다시 이에 대한 재반박문을 냈다. 이 법은 유독 같은 조항에 두고도 국정원의 권한을 놓고 시각이 첨예하게 갈리기 때문에 어느 쪽 의견에 동의할지는 자유다. 이 같은 토론이 공론화되면서 법에 대해 시민들이 다각도로 고민해보게 됐다는 게 의미 있다.

19대 마지막 정기국회가 끝나는 지난해 12월9일 오전까지 19대 국회 들어 발의된 법안 수는 1만7222건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본회의에서 가결된 법안 수는 5449건에 달한다. 본회의를 통과한 이 5500여개의 법안들은 모두 국민들의 삶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치고 생활을 바꾸는 것들이다. 그러나 평소 법안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미진한 수준이다.



이는 언론에도 책임이 있다. 언론은 국민들에게 의미 있는 법안, 정책 기사를 쉽게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정책보다는 여야 정쟁 등 자극적인 소재를 좇는 경향이 짙다. 법안과 정책은 아무리 중요한 내용이어도 기사로 써놓으면 지루하고 어렵게 느껴지기 쉽다. 테러방지법도 지난해부터 수없이 기사화됐지만 독자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면 언론 탓일 것이다.

평소 시청률의 10배를 상회하는 '국회방송' 시청률과 국회 본회의 방청 열기를 보낸 시민들은 더민주가 필리버스터 종료 결정을 내린 데 대해 실망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이미 법안이 직권상정 된 상태에서는 법안 저지가 불가능해 무한정 시간끌기는 무리수이기도 했다. 법안의 찬반을 떠나 법안에 대한 토론은 더욱 일찍 이뤄지면 좋았다. 일단 본회의에 부의되면 저지하기 쉽지 않고 한 번 제정된 법을 고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테러방지법? 그건 필리버스터에 하도 나오니까 알았지." 내 지인의 말이다. 혹시 많은 이들이 이렇지 않은가? 앞으로도 수많은 법안이 국회를 통해 우리 삶 속으로 들어올 것이다. 국회 각 상임위의 전체회의와 본회의는 인터넷 의사중계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필리버스터로 재발견된 민주주의는 이제 시작이어야 한다. 필리버스터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쓰기 이전부터 국회의 입법활동에 관심을 갖는 시민의식이 절실하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