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매창, 당신을 절절하게 그리워하는 걸 아시오?"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2016.03.05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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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오래 전 떠난 이들이 전하는 말을 듣는다

편집자주 여행은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수단이다. 여행자들이 전하는 세상 곳곳의 이야기는 흥미와 대리만족을 함께 안겨준다. 이호준 작가가 전하는 여행의 뒷얘기와 깨달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부안읍에 있는 매창 묘/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부안읍에 있는 매창 묘/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아름다운 풍경도 사람이 없으면 허전해 보일 때가 있다. 밀레(Jean-Francois Millet)의 '만종'에서 기도하는 부부가 빠진 것처럼…. 여행도 사람을 만나야 풍요로워진다.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오래 전에 살다간 이들의 자취를 따라가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공을 초월해서 많은 것을 듣고 배우게 된다.

전북 부안을 자주 찾는 이유도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다. 부안은 가는 곳마다 걸음을 붙잡을 정도로 볼거리가 많다. 내소사만 해도 사찰로 들어가는 길의 전나무 숲이 그렇고 고졸한 멋의 대웅전이 그렇다. 내소사 대웅전은 전설이 곳곳에 배어있어서 더욱 정이 간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소박한 아름다움의 절정을 보여주는 대웅전 꽃살문. 국화, 모란, 연꽃 등 다양한 꽃을 새겨놓은 꽃살문이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이 밖에도 부안에는 명소들이 많다.



하지만 내가 부안을 자주 찾는 이유는 400년 전에 이 땅에 살다가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의 이름은 매창. 조선시대의 기생이자 뛰어난 시인이었다. 허난설헌,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 3대 여성시인으로 꼽는다. 긴 설명보다 시 한 수가 그를 더 잘 말해준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교과서에도 실린 적이 있는, ‘이화우’로 시작하는 이 시의 작자가 바로 매창이다. 기생이었지만, 한 남자를 절절하게 사랑하고 그리워하다 서른여덟이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난 비련의 여인. 그녀의 자취를 눈으로 보고 싶으면 부안 읍내의 매창공원으로 가면 된다. 그곳에 매창의 묘와 그녀의 시, 그리고 그녀를 기리는 시비들이 있다.

매창은 1573년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면서 열여섯에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렸다. 평범한 기생으로 살다갔을지도 모를 매창의 일생을 뒤흔든 것은 사랑이었다. 기생이 된 지 2년, 매창이 열여덟 살 되던 해 한양에 사는 유희경이라는 이가 부안에 온다. 그는 한양에서 이름을 날리는 문인이었다. 매창보다 스물여덟 살 많은 유부남이었지만 두 사람은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유희경이 한양으로 돌아간 뒤 바로 임진왜란이 터졌고, 그는 의병이 되어 전쟁터로 나갔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세월이 한참 흐른 15년 만이었다. 매창은 그 사이에도 유희경을 잊지 못했다. 그녀의 시들이 지금도 남아 절절했던 심경을 증언해준다.

기다림에 비해 재회는 짧았다. 부안에 들렀던 유회경이 바로 한양으로 올라간 것이다. 매창은 그 뒤 시름시름 앓기 시작해서 3년 뒤인 1610년, 서른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부안의 사당패와 아전들이 그녀의 시신을 수습하여 지금의 매창공원에 묻어주었고, 나무꾼들이 벌초를 하며 돌봤다고 한다.


개암사 전경/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개암사 전경/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매창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으로 닿는 곳이 개암사다. 내소사와 함께 부안의 아름다운 절로 알려진 개암사는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해 이곳에 도성을 쌓은 뒤 전각을 짓고 동쪽을 묘암, 서쪽을 개암이라고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매창은 생전에 이 절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의 아픔과 기다리는 고통을 달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걸음마다 눈물 한 방울씩 내려놓았을까. 그녀와 개암사와의 인연은 죽은 뒤에도 이어진다. 그녀가 떠나고 58년 뒤인 1668년에 58편의 시를 모아 '매창집'을 간행했다. 그 목판본 시집을 발행한 곳이 개암사였다. '매창집'은 간송문고와 하버드대 도서관 등에 보관돼 있다.

부안에 갈 때마다 매창공원과 개암사에 들른다. 매창을 불러 낮은 목소리로 사랑과 시와 인생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평생 한 남자를 그리워하다 떠난 여인 매창.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차지하거나 꿈 꾼 사랑에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하지만 후대에 시와 이름을 남겼다. 400년 뒤에 찾아온 한 사내가 절절하게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까? 오래 전 떠난 이를 찾아가는 여행은 늘 마침표가 아닌 쉼표를 찍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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