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민은행과 스위스용병의 성공비결…'빚이 아닌 신용'

머니투데이 이철환 단국대 교수 2016.02.12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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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환의 신용경제사회]①신뢰인프라 구축은 신용사회로 가는 기본

편집자주 빚(부채)에도 떵떵거리던 시대가 있었다. 한때 대마불사라고 불리던 대기업들 얘기였다. 빚에 짓눌리는 이들이 있다. 생활고로 빚을 내거나, 결혼이나 졸업, 내집 마련을 위해 빚을 선택한 이들이다. 10 ~ 20년 사이에 빚을 둘러싸고 다양한 현상이 나타난다. 경제기획원, 재정경제부, 한국거래소 등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은 이철환 단국대 교수 겸 한국무역협회 초빙연구위원(전 금융정보분석원(FIU) 원장)은 다양한 빚을 지켜봤다. 빚에 짓눌리다 채권국으로 변했던 국가가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탈출하는 것과 서민들이 카드빚과 주택대출에서 부자가 됐다고 생각하거나 방황하는 것 모두를 말이다. 그가 새로운 연작기고 ‘신용경제사회’에서 신용과 빚에 대한 견해를 밝힌다.

그라민은행과 스위스용병의 성공비결…'빚이 아닌 신용'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돈을 빌려주는 은행이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런 은행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바로 20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Grameen Bank)’이다.

그라민 은행의 신용대출



지난 25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방글라데시에서 고리대금업자의 횡포에 시달리던 빈민들에게 담보 없이 79억 달러 이상을 빌려준 은행. 2,544개가 넘는 지점을 통해 780만 명이 넘는 고객에게 돈을 빌려준 곳. 고객 가운데 98%가 여성이고, 대출금 상환율은 98%로 체이스맨해튼 은행의 상환율과 비견할 만한 은행 등의 기록을 세우며 새로운 은행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이 은행의 특징은 주로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에게 담보 없이 소액을 단기대출 해준다는 것이다. 고객 대부분은 그 어디에서도 대출을 받을 수 없는 빈곤층이다. 하지만 자선사업이 아닌 이상 이들에게 돈을 갚겠다는 약속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그라민은행이 주목한 지점은 바로 전통적 의미의 담보인 금전적 담보가 아닌 '신용'이라는 사회적 담보였다. 이것이 고리대금의 횡포에 시달리던 빈민을 위한 무담보 소액자금 대출행위인 마이크로크레디트(microcredit)의 시발점이다.



그라민은행에서 돈을 빌리려면 그 사람은 5명의 채무자로 구성된 모임과 이런 모임 8개가 모여 40명의 채무자로 구성되는 센터에 무조건 가입해야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 그 구성원의 한 사람이 돈을 제때 갚지 못하면 그 구성원 전체가 앞으로 돈을 빌릴 수 없다. 때문에 자동적으로 상호 감시가 되며, 서로가 돈을 갚아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가 되는 것이다. 이 집단에서는 서로 간의 '신용'이 가장 중요한 자산이었다.

신용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주요 사례들

이 ‘신용’ 내지 ‘신뢰’의 중요성을 우선 역사적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일이다.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민 혁명군에 포위되었을 때 궁전을 마지막까지 지킨 것은 프랑스군이 아닌 스위스 용병이었다. 시민혁명군이 퇴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스위스용병은 끝까지 왕과의 계약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당시 한 용병이 가족에게 보내려 했던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가 신용을 잃으면 후손들이 영원히 용병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으로 계약을 지키기로 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스위스용병이 로마교황청의 경비를 담당하는 전통의 배경이다. 이 스위스 용병의 신화는 스위스은행의 신화로 다시 이어졌다. 용병들이 피 흘려 번 돈을 관리하는 스위스은행의 금고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지켜야 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 결과 오늘날 스위스은행은 안전과 신용의 대명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사회심리학과 게임이론에서 많이 활용중인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에서도 신뢰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이는 두 사람의 협력적인 선택이 둘 모두에게 최선의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한 선택으로 인해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나쁜 결과를 야기하는 현상을 말한다. 즉, 두 공범자가 서로를 신뢰하고 협력해 범죄사실을 숨기면 증거 불충분으로 두 사람 모두 형량이 낮아지는 최선의 결과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상대방을 믿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상대방의 범죄 사실을 말해 주면 형량을 감해 준다는 수사관의 유혹에 빠져 상대방의 죄를 고발함으로써 둘 다 무거운 형량을 선고받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하여 ‘서로’가 아닌 ‘자신’에게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한다. 그래서 서로를 배신하지 않고 협조했을 때의 결과보다 나쁜 결과를 맞게 된다.

물론 이 ‘죄수의 딜레마’ 이론은 게임이론에서 비롯되었지만, 사회적 현상에서 반면교사로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떤 딜레마 상황에 처하게 되면 서로의 신뢰만이 상호 간에 최악의 결과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이 된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미국의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도 그의 유명한 저서 『신뢰(Trust)』를 통해 국가발전에 있어 신뢰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우리나라를 신뢰도가 낮은 국가로 분류하였다. 사실 우리는 이미 선진국을 능가하는 수준의 IT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신뢰인프라가 아직 제대로 구축되어있지 못한 탓으로 우리의 국가경쟁력은 여전히 선진국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경제사회에서 국가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적 투입요소는 지식과 기술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기본적인 요소는 ‘사회적 신뢰’라 할 것이다. 이 사회적 신뢰 수준이 낮은 국가는 경제사회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고속도로나 통신망 등과 같은 물질적 인프라가 경제· 사회 활동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신뢰는 사회 구성원 간의 협력을 가능하게 하여 경제사회 문제해결의 효율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적 신뢰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라고 불린다.

사회적 자본이 부족한 사회는 기초가 부실한 건물과 같다. 신뢰의 부족으로 사회구성원들은 서로의 선의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기만 할 뿐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뢰 부족은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켜 국가적으로 엄청난 비용을 초래하고 있다. 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사람들은 정부 발표나 전문가의 이야기보다도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이나 근거 없는 주장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로 인해 결국 경제를 포함한 국가 전체의 효율성과 경쟁력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특히 금융은 신뢰를 기본으로 하는 비즈니스이다. 우리는 최근에도 고객의 정보가 대량 유출되는 사고나 거액의 부정대출 사건 등 금융의 신뢰가 흔들리는 현상을 적지 않게 경험하였다. 그런데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금융산업이 신뢰를 잃으면 금융거래 및 서비스가 위축되기 때문에 경제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경제전체가 마비될 수도 있다. 우리는 금융에 문제가 생기면 경제전체가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이미 두 차례의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비싼 비용을 치르면서 교육받았다.

신용사회를 위협하는 모럴 해저드

오늘날의 사회를 두고 흔히 ‘신용사회’라고 한다. 신용사회란 개인의 신용이 공정하고 정확하게 평가되고, 이를 바탕으로 거래가 투명하게 이루어지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 신용사회에서는 신용이 없으면 경제생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사회생활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이 신용사회에서의 신용이란 개인의 재산 유무를 떠나 신뢰관계에 근거해 형성되는 사회적 신뢰이며, 그에 따른 책임을 동반한다. 이 사회적 신뢰가 부족한 사람들은 항상 자신들이 빠져나갈 구멍만 찾고 사회적인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이와 같이 법과 제도의 허점을 악용한 이익추구, 자기책임을 소홀히 하는 태도, 집단이기주의 등의 현상을 ‘모럴 해저드’라고 하며 우리말로 ‘도덕적 해이’로 번역해서 쓴다. 원래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는 미국 보험업계에서 나온 용어로, 정보를 가진 측이 정보를 가지지 못한 측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취하는 경향을 말한다. 이 개념이 확장되어 지금은 개인이 당장의 편익을 좇아 행동함으로써 장기적인 손실을 초래하는 현상을 뜻한다. 예를 들어보자. 예금자의 경우 예금보호제도에 의해 원리금 상환이 보장되므로 이율이 높으면 경영이 위태롭게 보이는 은행에도 돈을 맡기는데 이를 예금자의 모럴 해저드라 한다. 또 경영불안에 빠진 은행은 높은 이자를 주고 자금을 모은 만큼 다시 위험성이 높은 대출상대에게 높은 금리로 융자해 주게 되는데 이를 금융기관의 모럴 해저드라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신용사회에서 사회적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 이해관계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자신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사회구성원을 존중하는 자세, 사회전체의 이익을 위해 조금씩 양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사회구성원 간의 신뢰구축이 필요하다. 사회적 신뢰는 사회구성원이 사회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인식할 수 있게 하여 복잡한 사회적 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사회적 신뢰를 손상시키는 행위에 대해서는 반드시 사회적 제재가 가해져야 한다. 예컨대 허위공시, 허위보고, 허위보도, 위증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언론의 잘못된 보도, 속칭 찌라시와 인터넷 상의 유언비어 등 ‘아니면 말고’식의 풍토도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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