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대표적인업적은 한글창제다. 하지만 그의 치세에 눈부시게 발전한 천문학도 이에 뒤지지 않는 성과였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천문학은 제왕의 학문으로 여겨졌다. 임금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다스리는 존재였다. 따라서 천문에 어두운 왕은 군주의 자격이 없었다. 게다가 그 무렵 조선은 건국 초기라 불안정한 상태였다. 새 나라의 창업이 천명(天命)이었음을 널리 알려야 했다. 천문지식은 그런 상징적인 정치쇼에 홍보수단으로 써먹기 좋았다.
세종의 천문학 사업은 치밀한 계획 아래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갔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그는 즉위 초인 1420년 경 처음으로 천문대를 세우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장영실을 비롯해 윤사웅, 최천구 등 과학기술 전문가들을 육성한 것도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임금은 정례화된 북경사신단에 그들을 포함해 현지에서 최신 자료를 수집하고 필요한 공부를 시켰다. 중국, 아랍, 유럽의 천문지식들이 비밀리에 조선 땅으로 흘러들어왔다.
나아가 천문관측기구를 응용한 발명품들도 잇달아 내놓았다. 1434년 궁궐 바깥에 설치한 앙부일구는 해시계였다. 혜정교, 종묘 앞 등 가장 번화한 길목에 이 시계를 둠으로써 천명을 받은 임금의 위엄과 은혜를 과시했다. 이에 앞서 궁궐 안에는 자격루라는 물시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각에 맞춰 종, 북, 징을 치는 자동 시보장치가 눈길을 끌었으며 조선의 표준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1438년에 나온 옥루는 자격루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었다. 천체가 순조롭게 운행하고 백성이 농사일에 전념하는 유교적 지상낙원의 풍경을 재현했다.
세종의 천문학 사업은 무려 이십 년 가까이 진행된 국가적 프로젝트였다. 장영실은 프로젝트의 주요과제들을 수행한 핵심인재였다. 특히 자격루제작에 큰 공을 세워 임금의 총애를 듬뿍 받았고 벼슬도 두 계급이나 올라갔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를 개인적인 발명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장영실의 공적도 결국 세종이 직접 총괄한 국책사업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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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이 창제한 것은 한글뿐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시간은 사람이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주의 움직임을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삶과 합치하는 시간을 계산해낼 수 있다. 세종의 치세에 조선은 드디어 자신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더 이상 중국 황제에게 시간을 빌리지 않아도 되었다. '조선의 시간', 그것은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