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헌이지만 배상할 책임 없다?…'긴급조치' 논란의 역사

머니투데이 황재하 기자 2016.02.04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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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리포트][현재진행형 역사논란]③ 대법 "긴급조치는 국가행위…국가배상 책임 없어"

편집자주 역사적 해석을 둘러싼 전쟁이 총성 없이 벌어지고 있다. 아직도 피해자와 유족이 고통받고 있는 사건들에 대한 역사적 판단이 외교적·정치적으로 확정되지 못하면, 당사자들은 결국 사법부에 판단을 구한다. 때로는 이미 정치적으로 결정된 판단에 불복한 이들이 소송을 제기한다. 역사적 판단이 법정에서 갈린 사례들을 모아 봤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등이 2013년 3월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른 오종상씨(72) 등 6명이 제기한 헌법소원에 대한 헌재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등이 2013년 3월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른 오종상씨(72) 등 6명이 제기한 헌법소원에 대한 헌재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과거 유신헌법에 의해 발동됐던 긴급조치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 제약을 가할 수 있는 초헌법적 권리를 국가에 부여했다.
1972년 제정된 유신헌법 제53조는 '대통령이 국가위기 상황이라고 판단할 경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긴급조치를 발동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를 근거로 당시 정권은 1974~1975년 긴급조치 1~9호를 발동했다.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행동을 금지하고, 긴급조치 2호는 1호 위반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한다는 내용이었다.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 등 단체에 가입하거나 관련 활동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면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수색해 비상군법회의에서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고려대 학생들이 반정부 시위와 농성을 계속하자 이 학교를 대상으로 휴교 조치를 내리며 이를 어기면 누구나 영장 없이 체포·구금하고 군을 동원해 학교를 봉쇄할 수 있다는 취지의 긴급조치 7호가 발동됐다.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을 부정·반대·왜곡·비방하거나 개정·폐기하자고 주장하는 행동, 청원·선동 또는 이를 보도하는 행동을 일절 금지하며 위반하면 영장 없이 체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특히 긴급조치 9호는 1979년 10·26사태 직후 폐기되기까지 4년여 동안 이어지며 800여명을 구속시켰다.



유신헌법 제53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숨지고 1년 만인 1980년 10월27일 폐지됐지만, 긴급조치로 인해 수사를 받거나 구속됐던 피해자들은 누명을 벗고 피해를 배상받기 위해 지금도 법정에서 싸우고 있다.

◇헌법재판소 "긴급조치 1·2·9호 위헌"

헌법재판소는 2013년 3월 만장일치로 긴급조치 1·2·9호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긴급조치 피해자 6명이 낸 헌법소원 심판청구를 인정한 것이다.


헌재는 긴급조치가 참정권과 표현의 자유, 신체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한다고 판단했다. 기본권을 제한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목적의 정당성이나 방법의 적절성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봤다.

특히 헌재는 "헌법의 최고 이념은 국민주권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입헌민주헌법의 기본원리에 기초하고 있다"며 "집권세력의 도덕성이나 정당성에 대해 정치적 반대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정치적 자유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대법원도 긴급조치가 위헌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대법원은 2010년 12월 "긴급조치는 국회가 만든 법률이 아닌 만큼 헌재가 아닌 대법원에서 위헌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후에도 대법원은 2013년 4월 긴급조치 9호가 위헌이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고, 같은 해 9월에는 긴급조치 4호에 대해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헌재와 대법원이 이같은 결정을 내놓자 긴급조치 위반으로 처벌받았던 많은 사람들이 재심 소송을 통해 일괄적으로 권리를 구제받을 길이 열렸다는 관측이 나왔다.

◇대법원 "대통령, 긴급조치 정치적 책임 뿐…법적 책임 없어"

헌재와 대법원이 여러 차례에 걸쳐 긴급조치의 위헌성을 인정했지만, 대법원은 이후 '긴급조치 자체만을 이유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놨다.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지난해 3월 긴급조치 9호에 의해 중앙정보부에 구금됐던 최모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했다.

긴급조치권을 행사한 결정은 국가행위인 만큼 대통령은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에 대한 민사상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대법원은 "긴급조치를 발령한 대통령의 행위가 국가배상법에서 정하는 '공무원의 고의·과실에 의한 불법행위'라고 본 원심 판단은 잘못됐다"고 설명했다.

바꿔 말해 유신정권 당시 수사·정보 기관 공무원이 불법적인 행위를 했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가 있다면 국가가 배상해야 하지만, 단순히 긴급조치에 의해 체포됐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같은 판결이 나오자 피해자들과 진보 성향의 변호사 단체는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법원과 헌재에서 무효·위헌으로 선언한 긴급조치에 대해 국가의 민사 책임을 인정하지 않아 모순이라는 지적이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논평을 통해 "종전 전원합의체 판결과 헌재 결정을 뒤집고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라며 "이번 판결은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고도의 정치적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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