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승진' 고법 부장판사 인사폐지 배경은?

머니투데이 황재하 기자 2016.01.21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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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리포트][법관의 꽃 고법부장]② 2010년 정치권 '사법개혁' 논의에 자구책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사법부가 다음달 초 정기 인사를 앞둔 가운데 고등법원 부장판사 인사가 폐지 수순을 밟게 된 배경이 새삼 관심을 모은다. '법관인사 이원화' 제도에 따라 2011년 임명된 고법 판사들이 승진을 통해 처음 고법 부장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대두되면서다.

◇ "법원 내 유일한 승진은 고법 부장"



20일 법조계에 따르면 단계적 폐지 수순을 밟고 있는 현행 법관 인사 제도는 '초임 판사→지법 부장→고법 부장→법원장' 순서로 이뤄진다. 이 가운데 지법 부장에서 고법 부장으로 가는 인사는 명목상 전보지만 사실상 승진의 성격을 가진다.

초임 판사가 지법 부장으로 임명되거나 고법 부장이 법원장으로 임명되는 과정은 순조롭게 이뤄진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탈락자가 나오지 않는다. 한 재경지법 판사는 "공식적으로 어떤 명칭을 쓰건 사실상 법원에 승진 인사는 지법 부장에서 고법 부장으로 가는 과정 뿐"이라고 설명했다.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관행적으로 매년 지법 부장들 중 사법연수원 3개 기수에서 고법 부장으로 임명할 대상을 찾는다. 바꿔 말해 기수마다 3차례의 기회가 있는 것이다. 2014년 첫 고법 부장 인사 대상에 오른 21기 지법 부장이 올해에도 고법 부장으로 임명되지 못하면 더는 기회가 없다.

처우에도 차이가 있다. 지법 부장은 1급 공무원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고법 부장은 차관급으로 인정된다. 같은 부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지만 법원 내에서의 위상은 다른 것이다. 이같은 여러 이유로 고법 부장은 사법부 내에서 '법관의 꽃'이라고 불린다.

◇ 꾸준히 문제점 지적된 고법 부장 인사…정치권 비판까지


고법 부장으로 임명되는 '막차'를 놓친 지법 부장들은 매년 관행적으로 줄사표를 내고 법원을 떠난다. 자리에 남아 있으면 동기나 후배들이 고법 부장 자리에 오르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

이같은 고법 부장 인사는 법원 내부에서 꾸준히 문제로 지적됐다. 많은 재판 경험을 갖춘 판사들이 매년 사퇴하며 위화감을 조성할 뿐 아니라 법원으로서는 큰 손실을 입는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퇴직한 부장판사들이 대거 변호사로 활동하면 '전관 예우' 의혹이 근절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 법원이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들에게 아무런 특혜를 주지 않더라도 의뢰인들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비싼 수임료를 지불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고법 부장 인사를 없앤 결정적 계기는 정치권의 개입이었다. 사법부는 이용훈 전 대법원장 시절인 2009~2010년 정치적으로 민감한 형사사건 판결 때문에 집권 여당이었던 한나라당과 마찰을 겪었다.

국회의 강제퇴거를 거부한 혐의로 기소된 민주노동당 당직자 직원 12명이 2009년 11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데 이어 이듬해 1월 '공중부양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같은 당 강기갑 대표도 무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이에 한나라당은 2010년 1월 '사법제도개선특위'를 구성하고 사법부를 개혁하겠다고 나섰다.

한나라당은 특위 구성 2개월 만에 내놓은 법원제도 개선안에서 대법관 증원, 경력법관제 도입과 함께 '대법원장의 인사독점권 견제'를 주요 과제로 꼽았다. 대법원장 한 사람이 전국 판사들의 인사권을 쥐고 있어 헌법상 보장된 법관의 독립성이 침해받는다는 주장이었다. 이후 발표된 구체적인 방안은 대법원 법관인사위원회에 외부인사를 60% 참여하게 해 법관 인사를 의결·심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박일환 전 법원행정처장. /사진=뉴스1박일환 전 법원행정처장. /사진=뉴스1
◇ 대법원 "사법부에 대한 예의·존중 잃었다" 강력 반발

대법원이 한나라당의 개선안을 수용한 것은 아니다. 박일환 당시 법원행정처장은 한나라당이 개선안을 내놓은 지 하루 만에 성명을 내고 "사법부의 자율적 인사운영은 사법부가 독립성을 지키고 헌법상 책무를 다하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개선안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려는 진행방식 자체만으로도 매우 부적절하며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라며 "사법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심마저 잃은 처사"라고 지적했다.

전국 법원의 운영을 책임지는 법원행정처장이 직접 성명서를 발표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이후에도 6년 동안 대법원은 단 1건의 성명도 발표하지 않았다. 대법원이 정치권의 압력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 고법 부장 인사 폐지 담은 '법관인사 이원화' 공식화

대법원은 성명 발표 8일 만에 자구책을 내놨다. 여기에는 법관을 1심 판사와 2심 판사로 분리하는 '법관인사 이원화'가 포함됐다. 지법 판사와 고법 판사를 분리하고 지법과 고법 사이 순환·교류 인사도 없앤다는 내용이었다. 승진으로 인식되는 '지법 부장→고법 부장' 인사를 없애 대법원장의 인사권을 축소한다는 취지였다.

사법부로서는 이전부터 내부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된 고법 부장 인사 제도를 없애는 동시에 외부에서 인사권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막기 위한 타협안이었다. 대법원은 인사위원회에 외부인사를 참여하게 하는 한나라당 개선안은 수용하지 않았다.

이후 대법원은 여러 차례에 걸친 내부 논의 끝에 법관인사 이원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확립해 나갔다. 7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지법 부장→고법 부장' 인사를 없애고, 이같은 인사 정책의 마지막 대상을 24기로 정한다는 방침도 정했다.

사법부의 강한 반발에 부딪힌 여당도 더 이상 법원 인사권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법관인사 이원화를 비롯한 사법개혁안이 이듬해 정기인사에서 도입되며 사태는 일단락됐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당시 대법원이 떠밀리듯 인사 개선안을 내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사법부의 인사에 개입하려는 입법부의 시도를 막은 것"이라며 "그대로 정치권에 휘둘렸다면 사법부 독립성은 심하게 훼손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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