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창원, 새누리당 전 비대위원 이준석을 파헤치다<1부>

더리더 편승민 기자 2015.12.31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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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더리더에서는 7월호부터 ‘표창원의 리더 인사이드(Leader Inside)’를 신설한다. 이 코너에서는 한국 최초의 프로파일러 표창원 소장이 매월 여·야 정치인과 지자체장, 공기관장 중 차세대 리더로서 주목해야 할 사람들을 만나본다. 이 시대의 진정한 리더를 찾아 헤매는 이들을 위해 범죄심리학 전문가 표창원 소장이 나선 것이다.

표창원, 새누리당 전 비대위원 이준석을 파헤치다<1부>



리더의 조건?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고 이야기한 프랑스 혁명의 영웅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발탁되었을 때 그의 나이 27세.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제 1대 황제로 ‘삼국지’의 영웅인 유비가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관우, 장비와 함께 토벌에 나섰을 때 그의 나이 24세. 일제강점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해방운동에 앞장섰던 한국 역사의 영웅 유관순 열사의 당시 나이 18세. 나라를 위해 몸바친 난세의 영웅들에게는 나이도, 성별도 중요치 않았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은 리더의 부재에 목마름을 느끼며 단비를 내려줄 영웅을 애타게 찾고 있다.

이준석, N포세대를 구하라
연륜과 경험 많은 Old Man 중심이었던 정치판에 ‘젊은 피’가 수혈되면서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있다. 2011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강도 높은 쇄신안을 발표하면서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다. 박근혜 의원을 비대위원장으로 구성된 비대위원 중 국민들에게 전혀 생소한 ‘이준석’이라는 청년이 나타났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
하버드 출신에 교육 벤처기업의 대표이자,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교육봉사단체를 이끌었던 그에게 엄청난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전형적인 엘리트 집안을 대표하는 ‘여당스러운’ 인물이 아닐까, 아니면 저소득층과 소외계층의 교육과 복지문제를 주장하는 ‘의외로 개념 있는’ 인물이 아닐까 등등 그를 둘러싼 말들은 그의 등장만큼이나 무성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의원시절 삼고초려를 방불케 하며 직접 발탁한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박근혜 키즈’로 불리며 정부가 잘못된 행태를 보일 때마다 그는 어떤 발언을 하는지 늘 주목 받는다. 하지만 이준석은 젊은 패기만큼이나 할 말은 하는 ‘직언파’다. 그런 용기가 어디에서 나오냐고 물으면 “할 말을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딨느냐?”고 반문할 만큼 당차다.
‘표창원의 리더인사이드’ 신년호의 주인공은 이준석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 클라세 스튜디오 대표다. “제 나이에 어떻게 하면 더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을 해요.”라는 말에서 꿈 많고, 욕심 많은 청년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2016년, 조심스럽게 대한민국에 필요한 젊은 리더의 탄생을 기대해 본다.



표창원, 새누리당 전 비대위원 이준석을 파헤치다<1부>
하버드대 출신 이준석, 그를 둘러싼 금수저 논란

표창원: 요즘 아주 왕성한 활동에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은 제가 며칠 전 인터뷰에 앞서 트위터와 페이스북 친구들한테 이준석 위원에게 궁금한 질문 있으면 달라고 했더니, 많은 분들이 호응을 해주셔서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준석: 네, 감사합니다.
표창원: 우선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는 이준석 위원 개인의 삶에 대해 여쭙고 싶고요. 어떤 비전이나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준석 위원이 1985년 3월 생이에요. 전두환 군사정권의 제 5공화국의 정점에 태어났고, IMF 경제위기가 올 때쯤 유년기에서 청소년기로 넘어가는 시기였잖아요? 간단하게 그 당시에 느꼈던 것들과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이야기 해주신다면요?
이준석: 저희 아버지가 처음 집을 사서 정착한 곳이 노원구 상계동이에요. 서울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서울 내 이주의 역사만 봐도 한 가정의 모습이 그려지거든요. 어렸을 때 상계동에 살다가 아버지가 해외로 발령이 나서 싱가폴과 인도네시아에 1년씩 있었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정착한 곳은 목동이었어요. 목동에서 전세로 살다가 제가 서울과학고에 진학해서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제가 살았던 상계동과 목동이 대변하는 것이 무엇이냐? 딱 중산층의 위치라는 것이에요. 처음 정착했을 때 변두리지만 어쨌든 서울의 삶을 살려고 했던 아버지의 생각이 지금은 이제 약간 이해가 되요. 그리고 목동은 상징적으로 학군을 언급했을 때 좋은 곳이죠. 상계동의 집을 팔고 목동에 전세로 오기까지 어떻게든 자식들 교육 잘 시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투영되지 않았으면 그런 판단들을 못했을 것 같아요.



표창원, 새누리당 전 비대위원 이준석을 파헤치다<1부>
표창원: 이 질문부터 드리는 이유는 이준석에게 관심이 있는 많은 분들 중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혹시 ‘금수저’아니냐?” “같은 세대 젊은이들과는 다르지 않을까?” “성장하면서 현대사회의 어려움들, 시기적인 것들을 몸으로 겪지 않았기 때문에 가진 자의 정당이라고 하는 새누리당에 간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기 때문이에요.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준석: 사실 ‘금수저’라는 표현을 하려면 어느 정도 자산으로 인해서 이득을 본 적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대학교 빼고는 사립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어요. 초등학교와 중학교도 남들처럼 동네에 있는 학교를 다녔고… 아버지의 경제력으로 크게 이득을 볼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어요. 오히려 이것은 제 인생의 전반기보다는 정치에 입문하는 과정에서 급격하게 등장했기 때문에 나온 이야이 인 것 같아요. 아주 음모론적인 시각을 가지신 분들의 경우 “숨겨둔 박근혜 아들이다.”라는 등 별의별 얘기를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웃음) 왜냐면 그분들이 보기에 정치권에서 이준석의 등장에는 설명이 안 되는 부분들이 있겠죠. 정치현장에서 뛰기 위해서 노력하는 분들, 정말 좋은 뜻을 가지고 노력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분들도 있는데 저 같은 경우 단박에 큰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이 또 어떤 불합리한 이득의 영역에서 기인한 것 아니냐고 보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 보면 어떤 노력의 연장선들이었다는 것을 저도 알고, 저를 발탁한 사람도 인정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표창원, 새누리당 전 비대위원 이준석을 파헤치다<1부>

표창원: 하버드 대학교 재학 당시에 그러면 사회나 세상,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들을 형성했나요?
이준석: 우선 해외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하잖아요? 애국까진 아니더라도 환상자체는 많이 사라지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 이런 거에요. 한국에 와서 젊은 사람들과 대화해보면 많은 것을 시스템담론으로 가져가는 경우가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불행한 이유는 교육시스템이 잘못됐기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하버드에서 경험해봤지만 거기라고 커리큘럼이 아주 창의적이진 않아요. 그리고 저도 현재 구멍가게 벤처를 하지만 “창업에 있어서는 미국이 더욱 월등한 환경이다.” 이런 것들… 그런 담론들에 대해 저는 경험해보고 이야기 하니까 환상 없는 담백함은 있는 것 같아요. 환상을 가지지 않는다는 게 현실주의자적 측면도 있지만 적어도 제 삶에는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첫째로 외국에 대한 환상을 갖지 않으면서 문제를 오히려 국내에서 해결해보려는 시각을 가지게 된 것이 변환점이었던 것 같아요. 정치도 똑같아요. 제가 비대위원이라는 고위직으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게 나쁜 부분도 있었겠지만 좋은 부분이라면 적어도 환상은 가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치권에서 어쨌든 새누리당 최고위원 격으로 있어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되었기 때문에 막연하게 오르고자 하고 싶어하는 욕망이나 기대는 억제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정치에 열망을 가지신 분들을 30대나 40대부터 공천받기 위해 노력하고, 50대 60대가 되어 입성하는 분들도 계신데 그분 들은 목표 자체가 입성인 것 같아요.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적어도 그런 환상은 깨졌기 때문에 입성 자체가 중요치는 않은 것 같아요.

표창원, 새누리당 전 비대위원 이준석을 파헤치다<1부>
제가 정치권에 들어가게 된 계기가 교육봉사단체를 하고 인정받으면서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제가 비대위원이 된 것이 2011년 12월 26일 이었는데, 딱 2달전인 10월 26일 정치인으로 탈바꿈한 사람이 박원순 서울시장이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많은 고민을 했던 거죠. ‘아… 우리나라 정치의 범주가 예전에는 국회에 앉아있던 300명의 소수관료들이 하던 정치였다면 이제는 사회가 바뀌어서 넓은 의미의 정치, 세상을 원하는 대로 바꾸고 싶어하는 동력을 정치라고 본다면 이런 정치도 국민들에게 인정을 받겠구나.’ 라는 것을 알았죠. 박원순 시장의 경력은 시민단체에 있으면서 참여연대와 희망제작소를 만들었던 건데 그 이력만 보고 대통령 다음가는 선출직이라는 시장에 뽑혔죠. 그리고 일각의 우려와는 다르게 한 임기를 마치고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을 보면서 ‘아, 광의와 협의의 정치의 경계가 이렇게 허물어지는구나.’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도 지금 저한테 출마 할꺼냐고 묻는 분들이 있으면 그런 고민을 많이 합니다. 제가 방송을 하고 봉사단체를 하며 가진 영역의 틀 안에서, 제 나이대에서 어느 것이 더 세상을 많이 바꿀 수 있느냐라는 고민을 많이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왜 이렇게 자꾸 좌고우면 하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저한테는 진실한 고민인 것 같아요. 욕심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더 제 나이에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 때문인 것 같아요.


청년 리더, 합리성의 증진을 꿈꾸다

표창원: 이런 건 어떨까요? 캐나다 트뤼도 총리는 43세고, 영국의 캐머런 총리도 40대고, 국가지도자들이 상당히 연소화가 되면서 그 효과가 국가에 활력을 넣어주는 것 같아요. 게다가 그들 모두 보수 쪽이지만 성소수자 권리증대라던지, 여성의 절반 내각진출 이라던지, 과거 원주민 학대에 대한 반성 이라던지 대단히 혁신적으로 정치를 하고 있는데…. 이준석 대표가 만약 젊은 지도자가 된다면 어떨까요? 우리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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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 제가 정치활동 하면서 많이 언급하는 것이 원론이에요. 원론이라 한다면 토론회도 나가고 SNS에서 사람들과 교류하고, 논쟁하기도 하는데 정치의 합리성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싶어요. 지금은 합리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정책구조, 투표성향, 갈등의 과정을 보이고 있거든요. 저는 합리성을 최대한 늘리는 방향으로 가고 싶어요. 영국이나 캐나다는 이런 합리성의 단계를 뛰어 넘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 같아요. 거기에 도달하고 나면 가치에 대한 투쟁이 이루어질 수 있거든요. 지금은 같은 상황에서 뭘 던져도 비아냥과 조소가 나옵니다. 합리성의 범위 안에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서 표소장님도 겪으셨겠지만 국정원의 잘못된걸 비판하면 “안보에 관심이 없는 거냐?” 이런 식의 논리잖아요. 저 같은 경우는 새누리당을 비판하면 “너는 야당 넘어갈려고 하는거냐?”는 식이고, 꼭 모든 사람들에게 보수냐 진보냐를 물어야 직성이 풀리고… 이런 것들에서 탈피를 해야겠죠.

표창원: 새누리당이라는 정당자체와 우리나라의 집권세력, 기득권층이 그런 합리성을 우리사회에 가져오는데 가장 저해, 방해하는 분들이다라고 보는 시선이 꽤 계시잖아요? 그래서 이준석 위원처럼 대단히 합리적이고 진취적이고 젊은 분이 왜 그분들과 함께 하느냐 하는 비판을 많이 던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죠?
이준석: 저는 근데 이런 생각을 해요. 양비론이 되면 모르겠지만 지금 그 합리성의 영역에 있지 않은 것은 여당이나 야당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전에 모 연예인이 친노당 전라도당 했다가 곤혹을 겪기도 했지만, 꼭 그렇게까지 표현하고 싶지는 않지만 야당에는 속된말로 ‘계파주의’가 너무 팽배하단 느낌이 들어요. 여당의 경우 기득권 논리가 우세했던 것이 사실이에요. 그래도 제가 여당으로 온 이유는 뭔가 바뀐다는 느낌이 없었기 때문이죠. 새누리당 이전에 한나라당은 십 몇년 동안 당명을 유지해오면서 한나당의 과거와 과오까지 모두 들고 왔거든요. 책임정치를 구현한다는 측면에서 좋아했던 것이었어요. 야당은 변화가 너무 잦았고 ‘새정치’라고 하면 또 거기 쫓아가고 하는 식의 부화뇌동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저는 그런 형태가 싫었어요. 그래서 그걸 믿고 새누리당에 알박기를 해놓은 것입니다. 언젠가 10년이 지나서 제가 그것을 실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당은 갑자기 없어지진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는 거죠.

갈림길에 선 이준석, 고민의 끝은?

표창원: 어쨌든 이번 총선, 대단히 중요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에게도 그렇겠지만 새누리당도 그렇고 이준석 위원 본인에게도 그렇고요. 아직 결심을 굳힌 건 아닌가요?
이준석: 계속 이야기하지만 속된말로 광의의 정치냐 협의의 정치가 옳으냐를 아직도 고민하는거죠. 보수의 진영 속에서 초선의원으로서 지금 초선의원들이 모두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저렇게 되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제가 가지고 있는 언론의 노출도를 이용해 온건보수적인 것을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옳으냐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계속 고민 중입니다.
솔직히 제가 비대위를 했을 때는 19대 총선을 앞두고 비례대표 제안에 대해서 판단할 때 이런걸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최연소 타이틀을 한번 따볼까? 김영삼 이후에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 볼까?’ 하는 허세가 잡혀가지고,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진 않아요. 더 정치를 잘 이해하고 큰 틀에서 보다 보니 ‘내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최적화된 경로는 어디인가?’를 계속 묻게 되는 거죠. 지난 번에도 고민을 했지만 지난 번과는 다른 궤의 고민인 것 같아요.

표창원, 새누리당 전 비대위원 이준석을 파헤치다<1부>
표창원: 어쨌든 정치의 길로 들어섰으니까요. 4년 가까이 지났고, 초선의 벽은 언제든지 넘어야 되는 것이고요. 40대 정도에 정말 중요하게 우리 사회에 대한 변화를 이끌어 내려면 지금은 시작을 해야 되지 않은가 싶은 대요?
이준석: 그래서 그것도 항상 고민이에요. 별의별 생각 다 들어요. 어떤 분들은 이길 것 같으면 나가고 질 것 같으면 나가지 말라고 하는데 저는 오히려 그거엔 관심이 없어요. 진다고 해서 망할 것도 아니고… 또 다른 한가지는 내가 하고 싶었던 게 진짜로 많았는데 정치를 전업으로 하게 되면 그걸 버려야 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이에요. 배나사에서 가르치던 것들을 포기해야 되는가… 그리고 제 나이이기 때문에 하는 고민들도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포기해야 되는 건가? 같은 것들… 저도 되게 속물적인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 제가 지금 완전한 경제적 기반을 잡지 않고 정치권에 갔을 때 경제력이 있는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도 하고… 어찌 보면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건 정치보다도 더 큰 고민인 거 같아요.
(2부에 계속)

[표창원의 리더인사이드 - 이준석 편] 전문은 더리더(theLeader) 2016년 1월호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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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승민 기자
[email protected]

☞프로필

▶이준석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
1985년 3월 출생(서울특별시) / 서울 과학고등학교 졸업 / 하버드대학교 경제학, 컴퓨터과학 학사 /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 / 現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 대표교사 / 現 클라세스튜디오 대표 / 새누리당을 바꾸는 혁신위원회 위원장

▶표창원 범죄심리학연구소 소장
1966년 5월 3일 출생(경상북도 포항) / 경찰대 행정학 학사 / 엑시터대 대학원 석·박사 / 경찰청 제도개선기획단 연구관 /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 / 경찰청 범죄심리분석 자문위원 / 한국성폭력상담소 전문위원 / 한국 경찰발전연구회 회장 / 아시아경찰학회 회장 / 미국 샘휴스턴주립대 형사사법대학 초빙교수 /現 표창원 범죄과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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