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과학]'세인트 존스 칼리지'의 인문학은 과학이다

머니투데이 이명현 과학저술가·천문학자 2015.12.25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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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과학적 인식론은 이 시대 '핵심교양'의 중심

'위대한 탈출''위대한 탈출'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턴의 책 '위대한 탈출'을 왜곡해서 번역 출판했다가 망신을 당한 일이 있었다. 출판사에서는 왜곡의 의도는 없었다고 발뺌을 했지만 저자와 원저의 출판사는 잘못된 점을 적시하고 시정을 요구했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의도적 왜곡이 자행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이 정도의 일이 뭐 대수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무지와 그것을 또 자의적으로 해석해고 강요하는 습관화된 의도적 왜곡이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모순된 상황의 배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티븐 잡스가 '테크놀로지(Technology)'와 '리버럴 아츠(Liberal art)'의 만남이라는 화두를 들고 나왔던 것이 벌써 여러 해 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Liberal art'가 '고전적인 인문학'으로 해석되면서 인문학 열풍이 일었다.



어느 재벌가에서는 대학을 돌아다니며 인문학 특강을 열고 '인문 영웅'을 선발해서 인문학 성지로 여행을 보내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다 좋다. 하지만 'Liberal art'를 '인문학'으로 규정하면서 그 단어가 의미를 재창조하고 다시 그 규정에 따라서 의미를 재부여하기 시작하면서 'Liberal art'는 한국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본래의 뜻과 다르게 왜곡되어버렸다.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의도된 왜곡일 수도 있다.

졸업할 때까지 100권이 넘는 고전을 읽고 졸업하는 학교로 텔레비전에 소개되면서 유명해진 '세인트 존스 칼리지'라는 미국의 Liberal Art College가 있다. 이름 그대로 현대적인 'Liberal art' 교육을 가장 잘 수행하고 있는 대학 중 하나다.

우리나라에는 인문고전 책만 읽고 졸업하는 학교로 잘못 알려져 있다. 마침 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들이 학기를 마치고 귀국했다.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 대학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교과과정을 살펴봤다.


교과 과정은 몇 개의 축으로 이뤄져 있다. 4년 내내 이뤄지는 '과학실험' 트랙에서는 원전 과학 논문을 읽고 그 방식에 따라서 공부를 한단다. 이번 학기에는 상어 해부도 했다고 한다.

'수학' 트랙에서는 1학년 때 유클리드의 '기하원론'을 공부하고 4학년이 되면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을 푼다고 한다. '글쓰기와 음악' 트랙도 있다. '언어' 트랙은 원전 논문과 책을 읽어나가기 위한 과정이다.

고대 그리스어를 배우면서 그리스 철학 책들을 읽어나간다. 학년이 올라가면 라틴어를 배우고 프랑스어를 배운다. 4년 내내 일주일에 두 번씩 밤에 모여서 109권을 정해진 차례에 따라서 강독하고 토론하는 세미나를 개최한단다. 109권에는 고전 철학과 고전 문학 작품이 다수지만 중요한 과학 논문들도 거의 모두 포함되어 있다. 과학 관련 대학원에 진학할 학생들은 방학 때 이 학교와 협정을 맺은 다른 대학에 가서 과학 과목을 이수하기도 한다고 한다.

이것이 Liberal Art College인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 현재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커리큘럼이다. 이 이야기를 한 지인에게 들려줬더니 '과학입문학교'라고 해야겠다고 말했다.

'Liberal art'를 단순히 '인문학'이라고 해석해버리면 너무 많은 것을 놓쳐버린다. 나는 장대익 교수의 제안대로 '핵심교양'으로 부르는 것을 지지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핵심교양의 중심에는 과학이 자리할 수밖에 없다. '인문학'이라는 단어의 규정된 틀 속에 갇혀버린 이 시대의 핵심교양을 수면위로 끌어내는 작업이야말로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습관화된 왜곡을 차단하는 첫걸음인지도 모른다.

'과학적 인식론'이야말로 이 시대의 핵심교양의 중심이라는 것을 자각했으면 좋겠다. 왜곡된 '한국적 Liberal art'로부터 핵심교양을 복권시키고 상식의 시대로 나아가자.
[맛있는 과학]'세인트 존스 칼리지'의 인문학은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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