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육룡’, 세상을 바꾼 변방의 북소리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2015.10.10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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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31 - 육룡 : 변방을 개척하여 창업의 기반을 다지다

‘원조 육룡’, 세상을 바꾼 변방의 북소리


“해동(海東) 육룡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조선 세종 때 지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첫 구절이다. 새 왕조의 창업을 찬양한 노래답게 거창하다. 여섯 마리의 용이 하늘의 복을 받았다는 가사로 역성혁명을 합리화한다. 그렇다면 조선의 문을 연 ‘육룡’은 누구인가?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 이방지, 무휼, 분이 등 여섯 명의 주인공을 가리킨다. 셋은 실제 역사인물이고, 셋은 허구의 캐릭터다. 하지만 ‘용비어천가’에 등장하는 ‘원조 육룡’은 따로 있다.

918년 왕건이 세운 고려는 34대 공양왕에 이르기까지 474년간 지속되었다. 이 귀족의 나라는 무신정권과 몽골침략으로 체제에 금이 가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14세기 후반 고려는 ‘내우외환(內憂外患)’ 속에 가쁜 호흡을 몰아쉬고 있었다. ‘내우(內憂)’는 약탈에 가까운 권문세족의 토지확장이었고, ‘외환(外患)’은 남북으로 들이닥친 외적이었다. 극심한 민생파탄 속에 고려의 운명은 풀 한 포기 움켜쥐고 벼랑 끝에 매달린 처지였다.



길이 끝나는 지점이 보이자 또 다른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한 축은 ‘신진사대부’였다. 그들은 성리학적 이상을 내걸고 권문세족의 끝없는 탐욕과 도덕적 불감증을 비판했다. 그 중 일부는 새 나라를 꿈꾸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다른 한 축은 ‘신흥군벌’이었다. 홍건적과 여진족, 왜구의 끊임없는 노략질에도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이성계를 비롯해 독자적인 무력을 갖춘 군벌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역성혁명은 결국 신진사대부와 신흥군벌, 이 두 세력이 손을 잡은 결과였다. 그 결정적 장면은 1383년 정도전이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 함흥의 군영을 방문한 것이다. 당시 정도전은 이미 거사의 청사진을 품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것을 실현하려면 백면서생의 힘만으론 한계가 있었다. 그는 무력의 뒷받침을 얻기 위해 함흥으로 향한 것이다. 이윽고 무적의 이성계 부대를 본 그이는 넌지시 제 속내를 드러냈다.



“아름답습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태조실록)

군율이 세고 사기가 높은 이성계 군단은 정도전을 황홀하게 했다. 북소리는 엄중하고 창검은 번뜩였다. 오죽하면 ‘아름답다(美)’는 표현을 썼을까? 아마 이 정도 군사력이라면 거사를 도모할 만하다는 확신을 가졌을 터. 이 일화는 그동안 정도전과 이성계가 의기투합한 계기로 여겨져 왔다. ‘눈빛교환’을 마친 두 사람은 후일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역성혁명의 기운은 고려의 변방 동북면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이 대목에서 새로이 주목해야 할 점은 정도전이 이성계 못지않게 그의 부대를 눈여겨봤다는 것이다. 그 무렵 이성계는 황산에서 왜구 대군을 격파하는 등 남북을 오가는 눈부신 전공으로 전쟁영웅의 반열에 올라있었다. 그는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당대 최고의 무장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이성계가 명성을 얻은 데는 휘하 군단의 힘도 컸다. 그가 이끈 사병집단은 고려와 여진의 혼성부대로 대대손손 이성계 집안에 충성해왔다.


여기에는 집안 내력이 크게 작용했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본래 전주에 살다가 지방관과 시비가 붙는 바람에 일족을 이끌고 원나라에 투항했다. 그는 두만강 하류인 알동의 천호(千戶)로서 다루가치에 임명되었다. 이 관직은 증조부 이행리, 조부 이춘, 부친 이자춘이 물려받았다. 이성계 집안은 알동에서 함흥으로 근거지를 옮기며 세력을 키웠다. 이 일대에 섞여 살던 고려인과 여진족을 끌어 모아 부를 축적하고 정예군을 육성했다. 변방에서 고려 출신의 원나라 군벌로 착실하게 자리 잡은 것이다.

‘용비어천가’에 등장하는 ‘원조 육룡’은 이성계와 이방원, 그리고 이 네 명의 선조들이다. 변방을 개척하고 기반을 다진 누대의 노력이 쌓여 창업으로 이어졌다는 시각이다. 어찌 보면 조선왕조는 고려와 여진과 원나라,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변방에서 발원했다. 변방에서 북소리를 울리며 새로운 세상의 중심으로 행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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