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선의 컬처톡톡]좋구나, 길 막는 거리축제

머니투데이 황인선 문화마케팅평론가 2015.10.10 08:58
글자크기
[황인선의 컬처톡톡]좋구나, 길 막는 거리축제


일요일 밤 태평로. 일요일은 ‘하이 서울 페스티발- 거리예술제’ 마지막 날이었다. 저녁 6시부터 찻길을 설렁설렁 걸었다. 붉은 악마 캠페인 때는 가 볼 엄두를 못 냈었으니 나로서는 태평로 찻길을 처음으로 밟고 걸어보는 셈이다. 도로 한 쪽에서는 디제이 댄스뮤직 공연이 한참이라 2-30대 젊은이들이 몸이 들썩들썩한다. 연신 터트리는 천연색 스모크는 눈을 물들이고 큰 풍선들은 관중들 머리 위를 팡팡 날아다닌다. 좋구나. 천천히 광화문으로 향해 걷는다. 아침 10시부터 찻길을 막았다더니 도로엔 그 흔적들이 낭자하다. 어린이들이 아스팔트 도로를 화판삼아 그린 분필 자국과 테이프 종이들. 길이 비로소 나에게 온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 어릴 적 신작로 길이 이랬지. 넓은 길을 사람들이 걸어 다녔었어!’ 야, 좋구나.

시청 앞 광장에서 광화문을 향해 걸어가니 높이 8미터의 거대한 마리오네트 할머니가 떡 장승마냥 버티고 있다. 폐막 공연 ‘영자의 칠순 잔치’ 주인공 할머니시다. 칠순잔치라면 광복 70주년 올해만의 거리예술제 테마인가보다. 영자 할머니 퍼레이드를 보기도 전에 익숙한 연상이 막 떠오른다. 1945년에 태어난 이 땅의 딸, 아기였다가 소녀가 되고 아가씨가 되고 아줌마가 되었다가 할머니가 된 대한민국 보통 여자, 영자씨. 가난했고 무지하여 서로 싸웠고 게다가 서로 죽였던 시대의 이야기. 해방, 전쟁, 건설역군, 텍사스 몸 파는 아가씨들, 최루탄 속 학생들, 폭탄주 마시며 달린 수출 경제…. 하늘엔 누런 달이 휘영청. 차도를 걸으며 막 행복 호르몬 세로토닌이 돌던 내게 흥분 호르몬 도파민이 분출된다.



서울시 하이 서울 페스티발 폐막 공연인 ' 영자의 칠순잔치' 중 한 장면. 8미터 높이의 마리오네트 영자 할머니가 태평로 도로에서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사진=황인선 문화마케팅 평론가서울시 하이 서울 페스티발 폐막 공연인 ' 영자의 칠순잔치' 중 한 장면. 8미터 높이의 마리오네트 영자 할머니가 태평로 도로에서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사진=황인선 문화마케팅 평론가
서울시가 길을 과감히 열어 준비한 영자의 칠순 잔치는 끝났다. 이젠 길이 닫힐 시간. 모세가 연 홍해의 길이 닫히는 것도 아니건만 왠지 아쉽다. 애프터를 같이 하려 막 합류한 축제 전문가께서 강남 페스티발도 길을 반은 막았다고 전해준다. 이건 무슨 징후일까. 산업화 시대의 끝을 축제 기획자들이 먼저 감 잡은 건가. 얼마 전 서초구 서리풀 축제도 반포대로 길을 막고 서초강산 퍼레이드를 했었다. K-POP 콘서트, 화성으로 행하시던 정조의 장엄한 어가 행렬이 재현됐었다고 했다. 내가 사는 과천의 축제도 중앙로를 막는데 거기는 길 막기 축제의 선구자로 연혁이 이미 10년이 넘었다.

그 시간만큼은 과천 시민들이 이렇게 많았나 싶게 쏟아져 나온다. 자전거 타고 풍선 날리고 사진 찍고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중고등학생들 모습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길이 돌아오니 흥이 절로 난다. 그러고 보니 서울역 7017 프로젝트도 길을 바꾸는 것이다. 뉴욕의 명소가 된 하이라인 파크를 벤치마킹한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찻길을 사람 길로 바꾼다. 2017년까지. 청계천 물길도 말은 많았지만 성공한 프로젝트로 통한다. 이는 프랑스 파리의 비에브르 하천 재생 프로젝트에서 착안한 것이다.



산업화 시대, 차에 뺏겼던 길이 이제 돌아오는 건가. 기계가 주인인 효율의 세상에서 사람이 주인인 인본의 프레임으로 귀환하는 건가. 좋구나! 그런데 이게 아날로그 길의 귀환이라면 디지털 길의 귀환은 혹시 없을까? 다소 편견일 것임엔 분명하나 디지털 지진아인 나에겐 디지털에 무수히 깔린 길이 상품의 길인 듯만 느껴질 때가 있다. 디지털 광고, 디지털 쇼핑, 디지털 결제, 디지털 배달, 디지털 소셜 커머스...길들을 씽씽 달리는 건 상품과 머니. 정보의 평등으로 세상을 해방하겠다는 디지털 이노베이터들의 꿈은 이렇게 마케팅의 길로 되었다. 70년을 허위허위 넘어온 영자 할머니는 이제 이 디지털 고개 길을 어떻게 지나가시려나. 혹시 영자 할머니 팔순 잔치 때, 누가 이런 디지털 길을 잠깐이라도 막아줄 축제기획은 안하실까? 후후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