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플랫폼]'초콜릿 복근'은 여성을 위한 게 아니다

머니투데이 최유준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감성인문학연구단 HK 교수 2015.09.1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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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음악과 여성혐오'…'음악=서양음악'의 등식은 깨졌다

편집자주 ‘비평의 플랫폼’은 공연, 전시, 출판, 미디어에 대한 리뷰와 더불어 우리 사회의 이슈를 문화비평의 시각으로 의미를 분석하고 실천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코너입니다. 각 분야 비평가들의 깊이 있는 시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비평의 플랫폼’은 인천문화재단이 발행하는 격월간 문화비평웹진 '플랫폼'(platform.ifac.or.kr)에 게재된 글을 신문기사의 형식에 맞도록 분량을 줄인 글입니다. '플랫폼' 홈페이지에 오시면 전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비평의 플랫폼]'초콜릿 복근'은 여성을 위한 게 아니다


서양음악(클래식음악)은 그 존재가 의식되지 않는 곳에서 권력을 발휘해 왔다. 예컨대 한국 전통음악은 ‘국악’으로, 재즈나 블루스, 록음악은 ‘대중음악’으로 특정하여 불려온 반면 서양음악은 그냥 ‘음악’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음악의 이해’라는 말은 사실상 ‘서양음악의 이해’를 뜻했다. 이렇듯 체계 자체를 만드는 보편적 권력(부르주아 권력)의 익명성을 가리켜서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탈-명명화(ex-nomination)’라고 불렀다. 그것은 타자를 호명하되 그 자신은 호명되지 않는 권력의 성격을 뜻한다. 이를 젠더 정치의 맥락으로 옮기면, 남성 권력의 성격을 가리킬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여자 교수는 ‘여교수’, 여자 가수는 ‘여가수’지만, 남자 교수와 남자 가수는 그냥 ‘교수’이며 ‘가수’인 것이다.



19세기 낭만주의 오페라 무대에서 온음계와 기초 삼화음, 안정된 리듬 등이 남성적 권력을 표상한 반면, 불규칙한 리듬과 매력적인 반음계는 집시 카르멘으로 대표되는 ‘요부(妖婦, 팜므파탈)’로, 그리고 그들이 불러일으키는 성적(性的) 긴장으로 표상되었다. 당시의 부르주아 남성 권력은 오페라의 위선적 청중으로서 이들 요부의 아슬아슬한 반음계적 곡예를 성적 충동과 함께 즐기다가 마지막에는 ‘요부살해’를 통해서 도덕적 면죄부를 얻고자 했다. 그리하여 <카르멘>만이 아니라 <라트라비아타>와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 <라보엠>과 <나비부인>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기 오페라 속 여주인공들이 무대 위에서 죽고 또 죽었다. 폐렴에 걸려죽고, 칼 맞아 죽고, 스스로 할복하여 죽고….

아마도 서양의 전통 있는 오페라 극장에는 죽은 여주인공들의 원귀(寃鬼)가 서려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희생이 밀알이 되어 거둔 민주적 성과라고 말하면 지나친 언사가 되겠지만, 20세기 이후 서양의 현대음악은 온음계보다 반음계가 지배적인 음악으로 바뀌었다. 타자의 예술적 재현은 이렇듯 역설적인 측면이 있다. 타자의 재현은 주류질서와 남성 권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그것을 내파(內破)하는 계기도 아울러 갖는 것이다. 물론 음악회 청중들이 여전히 낭만주의 이전의 음악에 탐닉하느라 현대음악을 잘 안 듣는 데서 보이듯, 남성적 주류질서의 전복이란 현실에서는 여전히 먼 이야기 같지만 말이다.



대중음악은 본질상 서양음악(클래식음악)의 타자로서, 여성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라틴 댄스음악을 비롯, 전통 민속춤에 기반한 댄스음악의 경우 특히 춤 연행(performance)의 맥락에서 관습적으로 젠더 구분이 명확하고 남성의 주도가 분명하여 남성우월주의가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는 있지만, 대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세심한 배려가 전제되어 있다. 요컨대 대중음악은 본질상 타자들 사이의 교감과 연대를 표상하는 음악으로, 최근 사회 문제로 번지고 있는 여성 혐오라든가 ‘약자 혐오’와도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케이블 TV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 “쇼미더머니4”에서 일부 참가자의 여성혐오 표현으로 물의를 빚었지만, 그 역시 힙합 양식의 본질과 관련되기보다는 오히려 서양 낭만주의 오페라극장과 맥이 닿아 있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현상일 뿐이다. 자유시장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상품성을 높이기 위한 자극(특히 성적 자극)에 몰두하는 남성 음악가가 선택할 수 있는 궁극의 해답은 무엇일까? 적어도 그 해답 가운데 한 가지는 무의식적이나마 ‘요부 살해’의 유서 깊은 낭만주의적 전통을 따르는 일이 될 것이다.

어느덧 불혹의 나이를 훌쩍 지나 40대 중반을 넘어서고 보니 세상사의 변곡점들이 조금씩 읽히곤 한다. 그 변곡점들 가운데 하나는 남자들의 ‘초콜릿 복근’이 여성들에 의해 회자되기 시작하던 때,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른바 ‘훈남’ 청년들이 여성 출연자들 앞에서 쑥스러운 듯 왕(王)자가 새겨진 자신의 복근을 보여주고 그걸 보는 여성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부터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여 그 즈음부터 나잇살과 함께 내 배는 차오르기 시작했고 거리를 거닐면서 타인의 시선과 살진 내 모습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시선의 권력’을 느꼈다. 여성들이 지난 수 세기 동안 시달려 왔던 그 권력, 남성이었기에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던 그 권력을 말이다.

하지만, 그 권력의 본질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요컨대 헬스클럽에서 비지땀을 흘리는 남성들이 자신의 ‘초콜릿 복근’을 내보이며 자기증명을 해야만 하는 궁극의 대상은 여성이 아니다.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근면 성실 철저한 ‘자기 관리 능력’과 함께 여성을 향한 상품성까지 겸비하고 있음을 어필해야 하는 그 대상은 여전히 여성이 아닌 부르주아 남성 권력인 것이다.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여성(성적 소수자들 포함)뿐만 아니라 남성의 다수까지 타자화된다. 이른바 ‘김치녀’에 대한 비난 등 여성 혐오 현상의 배경에 무한경쟁 사회, ‘남성도 약자가 되어가는 현실’이 있다는 최근 MBC ‘PD수첩’의 진단은 그 자체로는 옳았다. 다만 ‘PD수첩’의 제작진은 그렇게 약자를 만드는 권력의 본질(여전히 남성적인)을 잘못 살피는 바람에 처방 또한 헛짚었다.

그럼에도 ‘초콜릿 복근’이 여성해방과는 무관하게 ‘시선의 권력’에 대한 총체적 이해의 계기를 내게 만들어 주었듯이, 최근의 여성혐오의 표현들과 음악 또한 젠더정치와는 무관하게 이 사회의 약자들과 타자들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계기를 만들어 주기를 나는 바란다.

지나치게 희망적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사는 21세기 사회가 그래도 오페라 무대에서 여주인공들이 비명에 죽어가던 19세기 가부장적 부르주아 사회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아졌다고 나는 믿고 싶다. 적어도 지금은 ‘음악’이 곧 ‘서양음악(클래식음악)’을 가리키던 20세기 사회로부터는 진일보 하는 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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