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이해’라는 말은 사실상 ‘서양음악의 이해’를 뜻했다. 이렇듯 체계 자체를 만드는 보편적 권력(부르주아 권력)의 익명성을 가리켜서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탈-명명화(ex-nomination)’라고 불렀다. 그것은 타자를 호명하되 그 자신은 호명되지 않는 권력의 성격을 뜻한다. 이를 젠더 정치의 맥락으로 옮기면, 남성 권력의 성격을 가리킬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여자 교수는 ‘여교수’, 여자 가수는 ‘여가수’지만, 남자 교수와 남자 가수는 그냥 ‘교수’이며 ‘가수’인 것이다.
아마도 서양의 전통 있는 오페라 극장에는 죽은 여주인공들의 원귀(寃鬼)가 서려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희생이 밀알이 되어 거둔 민주적 성과라고 말하면 지나친 언사가 되겠지만, 20세기 이후 서양의 현대음악은 온음계보다 반음계가 지배적인 음악으로 바뀌었다. 타자의 예술적 재현은 이렇듯 역설적인 측면이 있다. 타자의 재현은 주류질서와 남성 권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그것을 내파(內破)하는 계기도 아울러 갖는 것이다. 물론 음악회 청중들이 여전히 낭만주의 이전의 음악에 탐닉하느라 현대음악을 잘 안 듣는 데서 보이듯, 남성적 주류질서의 전복이란 현실에서는 여전히 먼 이야기 같지만 말이다.
한국의 케이블 TV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 “쇼미더머니4”에서 일부 참가자의 여성혐오 표현으로 물의를 빚었지만, 그 역시 힙합 양식의 본질과 관련되기보다는 오히려 서양 낭만주의 오페라극장과 맥이 닿아 있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현상일 뿐이다. 자유시장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상품성을 높이기 위한 자극(특히 성적 자극)에 몰두하는 남성 음악가가 선택할 수 있는 궁극의 해답은 무엇일까? 적어도 그 해답 가운데 한 가지는 무의식적이나마 ‘요부 살해’의 유서 깊은 낭만주의적 전통을 따르는 일이 될 것이다.
어느덧 불혹의 나이를 훌쩍 지나 40대 중반을 넘어서고 보니 세상사의 변곡점들이 조금씩 읽히곤 한다. 그 변곡점들 가운데 하나는 남자들의 ‘초콜릿 복근’이 여성들에 의해 회자되기 시작하던 때,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른바 ‘훈남’ 청년들이 여성 출연자들 앞에서 쑥스러운 듯 왕(王)자가 새겨진 자신의 복근을 보여주고 그걸 보는 여성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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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여 그 즈음부터 나잇살과 함께 내 배는 차오르기 시작했고 거리를 거닐면서 타인의 시선과 살진 내 모습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시선의 권력’을 느꼈다. 여성들이 지난 수 세기 동안 시달려 왔던 그 권력, 남성이었기에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던 그 권력을 말이다.
하지만, 그 권력의 본질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요컨대 헬스클럽에서 비지땀을 흘리는 남성들이 자신의 ‘초콜릿 복근’을 내보이며 자기증명을 해야만 하는 궁극의 대상은 여성이 아니다.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근면 성실 철저한 ‘자기 관리 능력’과 함께 여성을 향한 상품성까지 겸비하고 있음을 어필해야 하는 그 대상은 여전히 여성이 아닌 부르주아 남성 권력인 것이다.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여성(성적 소수자들 포함)뿐만 아니라 남성의 다수까지 타자화된다. 이른바 ‘김치녀’에 대한 비난 등 여성 혐오 현상의 배경에 무한경쟁 사회, ‘남성도 약자가 되어가는 현실’이 있다는 최근 MBC ‘PD수첩’의 진단은 그 자체로는 옳았다. 다만 ‘PD수첩’의 제작진은 그렇게 약자를 만드는 권력의 본질(여전히 남성적인)을 잘못 살피는 바람에 처방 또한 헛짚었다.
그럼에도 ‘초콜릿 복근’이 여성해방과는 무관하게 ‘시선의 권력’에 대한 총체적 이해의 계기를 내게 만들어 주었듯이, 최근의 여성혐오의 표현들과 음악 또한 젠더정치와는 무관하게 이 사회의 약자들과 타자들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계기를 만들어 주기를 나는 바란다.
지나치게 희망적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사는 21세기 사회가 그래도 오페라 무대에서 여주인공들이 비명에 죽어가던 19세기 가부장적 부르주아 사회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아졌다고 나는 믿고 싶다. 적어도 지금은 ‘음악’이 곧 ‘서양음악(클래식음악)’을 가리키던 20세기 사회로부터는 진일보 하는 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