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 시평] 역사는 기억하는 자만의 유산

머니투데이 정태연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 2015.05.22 07:10
글자크기
[MT 시평] 역사는 기억하는 자만의 유산


우리에게 지난 20세기는 그 물리적 기간에 비해 너무나 많은 사건으로 점철된 격동의 시기였다. 이 시기는 잊지 못할 또는 잊지 말아야 할 수많은 사건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 나름의 특별한 사회적 성격과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중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은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국민을 향해 군대가 총부리를 겨눈 이율배반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가 자유·평등·민주라는 근대적 가치를 실현하는데 그 출발점이 된 숭고한 사건이다. 이런 점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은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엄청난 일이다.

1980년 5월 그 화창한 봄날 그렇게 많은 사람이 꽃잎처럼 피 흘리며 쓰러진 것은 자신의 개인적 영달이나 보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대의를 위해 독재에 굳건히 맞선 의로운 몸짓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두루 따져보고 그 교훈을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요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일신의 안위를 위해 국민들을 배신하고 있는가.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면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사회적으로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이것이 그들의 넋을 기리고 그 뜻을 받들어야 하는 이유다.



안타깝게도 광주민주화운동 제35주년 기념식이 따로 열렸다. 정부가 주관하는 기념식은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있었고, 시민과 사회단체들이 주관하는 기념식은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목숨을 희생한 사람들의 고귀한 뜻과 그 가치를 기억하고 받든다는 대명제에서 볼 때 어느 쪽이든 기념식을 따로 해야 할 충분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희생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것이 성숙한 사회의 관리들이 취해야 할 태도다. 또한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지만, 큰 뜻을 품은 내용이 미흡한 형식을 끌어안을 수도 있다.

안타까운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광주 외에 어느 곳에서도 이 사건을 되새겨보는 행사가 있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비중 있게 다룬 언론기사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 흔한 스포츠경기에서도 이 어마어마한 사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공식적인 언급이나 의례가 없었다. 여러 이유로 발생한 해외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으레 경기 전 묵념을 하는 우리들이 정작 이 사회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기리는 데는 왜 이렇게 인색한지 모르겠다. 아직도 이 사건을 정파적인 입장이나 냉전적인 사고로 바라보는 우리의 현실이 기가 막히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그릇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때 희생된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진 것이다. 그들의 귀한 희생 덕분에 지금 우리는 과거 독재정권으로부터 해방된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아무리 하찮더라도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의 이면에는 누군가의 피와 땀과 생명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편안하게 누릴 때,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그 누군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도리다.

물론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 이상이다. 과거와 단절된 삶은 정신적으로 빈곤할 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피폐할 뿐이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회에 창대한 미래가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배우고 소중히 여기는 것은 곧 현재의 우리를 위한 일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잊지 않는 것은 그 희생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를 위한 일이다. 그들의 삶으로부터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고, 후손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역사는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주는 소중한 유산이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