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코 살린 '신생기업 정신'…"파괴적 변화는 기회"

머니투데이 김신회 기자 2015.05.11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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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회의 터닝포인트]<56>시스코시스템스 존 체임버스 CEO

편집자주 |세계적인 기업들이 겪은 '성장통'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일종의 '케이스스터디'라고 해도 좋겠네요. 위기를 황금 같은 기회로 만드는 재주를 가진 글로벌 기업들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세계 최대 통신네트워크 장비회사인 미국 시스코시스템스의 존 체임버스 CEO(최고경영자)가 오는 7월 물러난다. 1995년 CEO에 오른 지 20년 만이다. 미국 IT(정보기술) 메카 실리콘밸리에서 창업자가 아니면서 이만큼 오래 자리를 지킨 CEO는 손에 꼽을 정도다. 1995년 12억달러였던 시스코의 매출은 지난해 470억달러로 불어났고 같은 기간 주가는 1400% 올랐다. 체임버스는 세계적인 경영저널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가 지난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성과 좋은 CEO 100명' 가운데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미국 생명공학업체 길리어드사이언스의 존 마틴에 이어 3위에 올랐다.

체임버스가 이처럼 성공한 CEO가 되기까지는 시련도 많았다. 체임버스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CEO가 된 이후에만 회사가 4번이나 존폐위기를 맞았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닷컴버블(거품) 붕괴 직후인 2001년을 생애 가장 암울했던 순간으로 꼽았다. 인터넷 거품이 절정에 달한 2000년 3월 한때 시스코는 마이크로소프트(MS)를 제치고 세계 최대 시가총액 기업으로 등극했다. 당시 시총이 5570억달러에 달했다. 하지만 2000년 3월 장중 82달러까지 치솟았던 주가는 이듬해 11달러까지 추락했고 매출은 20% 가까이 급감했다.



시스코 연간 매출 추이(단위: 십억달러)/그래프=블룸버그시스코 연간 매출 추이(단위: 십억달러)/그래프=블룸버그


닷컴버블 붕괴와 뒤따른 기술 환경의 상전벽해는 컴팩, 선마이크로시스템, 왕래버러토리 등 시대를 풍미했던 IT 기업들을 몰락시켰다. 체임버스는 HBR 5월호에 실은 기고문에서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이들이 사라진 것은 시장이 어디로 갈지 예측하지 못한 탓이라고 지적했다. 시스코는 시장 움직임을 미리 간파하고 변화를 주도한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시스코는 통신중계장치인 라우터와 스위치 등 기존 영역에서 벗어나 클라우드 컴퓨팅, 모바일, 만물인터넷(IOE)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체임버스는 근본적인 기술 변화에 주목하면 데이터, 보안 등 기술적 측면은 물론 사업 모델에 대해 남들과 달리 생각하게 된다며 시장 파괴적인 변화(disruption)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라고 강조했다.

체임버스는 HBR 기고에서 시스코가 파괴적인 변화를 주도할 수 있게 된 데는 '신생기업 정신'(start-up mentality)이 주효했다고 밝혔다. 먼저 기술 흐름의 근본적인 변화를 포착했다면 전통적인 R&D(연구개발)로 내부에서 신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스코는 현재 전체 매출의 15%를 R&D에 쓴다. 닷컴버블이 터졌을 때도 투자에 적극적이었다. 다른 IT 기업들이 대개 R&D를 중단하거나 보류할 때 시스코는 오히려 인터넷폰 서비스, 스토리지, 무선 네트워킹 등 신규 사업 부문에 340억달러를 투자했다. 체임버스는 당시 구조조정을 통해 CEO 중심의 상명하달식 경영체제에서 벗어나 새로 꾸린 다양한 혁신 조직에 권한을분산했다. 의사결정 속도가 빨라져 기술 개발에 속도가 붙었다.



시스코는 내부 R&D의 한계를 신생업체 지원 사업 등을 통해 극복했다. 유망한 신생업체에 자금 지원, 멘토링 역할 등을 해주거나 협업 기회를 주면서 아이디어를 실제 사업으로 구현해냈다.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M&A(인수합병)로 채웠다. 체임버스가 인수한 기업이 174곳에 이른다. 그는 IT 기업을 인수하면 실패한다는 게 1990년대의 통념이었지만 시스코의 기업 인수는 대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시스코가 시장 변화를 앞서 나가는 데는 '스핀인'(spin-in) 전략도 큰 몫을 했다. 스핀인은 특정 프로젝트를 위한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회사 밖에 스타트업을 꾸린 뒤 성과를 내면 인수하는 방식의 사외벤처 투자 전략이다. 체임버스는 시스코가 현재 스핀인을 통해 고용하고 있는 280명이 수십억 달러 규모의 미래 사업 기반을 닦고 있다며 덕분에 혁신적인 제품을 경쟁사보다 빨리 내놓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갈수록 빨라지는 기술 환경의 변화와 치열해지는 경쟁은 여전히 시스코에 위협적이다. 서버를 가상화하는 클라우드 컴퓨팅의 발전으로 장비 수요가 줄고 있는 가운데 시스코의 케이블네트워크장비 시장 점유율은 2013년 52%에서 지난해 29%로 떨어졌다. 2005년 10%대 중반이었던 연매출 증가율은 올 회계연도에 4%에 그칠 전망이다. 시스코의 주가(8일 종가 기준)는 닷컴버블 절정기의 37% 수준으로 MS(43%)나 나스닥지수(99%)보다 갈 길이 멀다. 체임버스의 바통을 이을 척 로빈스 글로벌 영업 총괄 선임부사장에겐 전임자의 명성만큼이나 큰 부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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