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Kelly Hunter in Flickr
기억에 남는 건 매 라운드가 끝난 뒤 어김없이 등장하던 보리탄산음료 광고뿐이다. 까맣게 잊고 있던 그 음료의 묘한 맛을 떠올리게 하는 김수미 할머니의 힙합복장과 랩은 두 사람의 경기보다 훨씬 인상적이었으니까. Pac Man(파퀴아오)이 Pretty boy(메이웨더)를 집어 삼켜버리지 못해서가 아니다. 재미가 없어서다. 오죽하면 이 경기의 진정한 패자는 그 어느 쪽 선수도 아닌 관람객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그런 의미에서 연애를 한다는 건 참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링에 함께 서 있기 위해 투쟁을 최소화하는 사랑이란 감정을 계속해서 유지해야 한다. 그건 꽤 힘든 과정 이다. 지금 파퀴아오와 메이웨더의 재방송 경기를 보고 있는 커플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들 덕분에 가게의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었다. 진즉 채널을 돌릴걸 그랬다.
"나쁜 놈 좋은 놈이 어딨어. 아무리 인품이 그래도 링 위에서 까지 그걸 적용시키면 안 돼."
하관이 도드라진 큰 입을 가진 여자는 파퀴아오를 열렬히 응원하고 있었다. 딱히 권투에 관심이 있는 것 같진 않았지만 신문기사를 통해 가정적이고 사회공헌적인 파퀴아오의 모습을 많이 접한 것 같았다. 여자보다 더 흰 피부를 가진 남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경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딱히 누구의 편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메이웨더를 응원하는 것 같은 양상이 된 것이다.
영화 '쩨쩨한 로맨스' 스틸컷/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나 특별히 응원하는 사람 없는데? 그리고 원래 나처럼 안 싸우는 남자가 좋은 거야."
"그건 오빠가 나한테 무관심해서 그렇지. 사랑이 깊다면 싸우기도 하고 그러는 건데."
"(회피)근데 넌 쟤가 남자답지 않다고 생각해? 저 몸이?"
"몸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잖아."
"(웃음)네가 빡싱(복싱)을 잘 몰라서 그래. 피하는 간격 안보여? 저걸 알아야 재밌지."
"이런 식으로 화제전환 또 하지마. 그리고 나도 권투 알거든? 오히려 모르는 건 오빠겠지. 사람들 다 재미없다고 난리였는데 오빠만 재밌어?(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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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목소리가 격양되기 시작했다. 남자는 태연하게 시선을 돌려 TV에만 집중을 했다. 세 차례 정도 그런 광경이 반복되는 걸 지켜보고 있자니 두 사람의 모습이 링 위의 선수들과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집요한 인파이터인 여자의 공격을 남자의 아웃복싱이 무력화 시키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엔 클러치를 통한 애교로 무마시키기도 하면서. 그럴 때면 여자의 시선은 곧바로 TV를 향하지 않고 남자의 얼굴을 약 5초가량 노려보았다. 이쪽을 봐. 이쪽을 보라구. 여자는 남자를 향해 그렇게 말하는 듯 했지만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TV를 쳐다보고 있었다. 9라운드의 끝을 알리는 공이 울리고 나서야 남자는 여자와 정면으로 마주하기 시작했다.
둘의 분위기는 상당히 험악해진 상태. 난 어떻게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야 할지 눈치만 보고 있었다. 케이크를 줘야 했기 때문이다. 남자가 어제 미리 방문해서 주문하고 간, 만난 지 1년째 되는 날을 축하하는 생크림 케이크였다. 아, 어쩌면 그녀는 남자가 1년째 되는 기념일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속이 상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 주문하고 가신 케이크 여기 있습니다" 일부러 남자의 정성을 강조하는 멘트를 했더니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여자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 진 것 같았다. 그녀는 케이크의 데코레이션이 예쁘다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시트가 뜨거울 때 생크림을 얹으면 안돼요. 아무리 좋은 크림과 손재주가 있어도 시트가 완전히 식은 후에야 데코가 가능하거든요. 그러고 보면 연애에서 싸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감정이 지나치게 극에 다다라 뜨거운 상황에선 도무지 좋은 말을 주고받을 수가 없잖아요? 감정에 치우치기만 하니까요. 근데 감정은 케이크와 달라서 그 온도를 제대로 알 수가 없으니 안 싸우는 게 제일 좋긴 하죠"
영화 '쩨쩨한 로맨스' 스틸컷/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사랑도 본능이고 싸움도 본능이죠. 싸우지 않으려는 노력을 존중하고 따르면 좋겠지만 싸울 수밖에 없는 일이 분명 존재해요. 그래서 기왕이면 잘 싸우는 방법을 알아두는 게 연애에 도움이 되겠죠?" 여자가 남자를 쳐다봤다.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 순간 발생해버린 갈등에너지를 그 자리에서 완전히 해소 하는 거예요. 잔여하게 된 응어리는 점점 더 그 몸집을 키우거든요. 한계치가 넘어서 속에 담아내기 버거워지면 일부는 표면으로 드러나죠. 그럴 때 내부의 그것까지 완전히 소거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의 연인들은 그러질 못해요. 우리가 해소했다고 느끼는 건 표면으로 튀어나온 응어리의 일부일 뿐이거든요"
응어리의 부피가 커지지 않는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 그것은 우리의 시선을 부피로 돌려놓곤 자신의 밀도를 더 단단히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갈등 중 대표적인 것은 싸워야 할 만한 일이냐 참을 수도 있는 일이냐에 대한 의견차다. 이런 갈등은 근본적인 원인에서 벗어난 2·3차적인 싸움을 만들어 낸다. 그런 형태의 싸움은 두 사람의 유대감을 더 굳건히 하는 발전적인 싸움이 될 수 없다. 그저 말꼬리를 물어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나의 위치만을 확고히 하려는 이기심의 발현일 뿐이다. 그러니 관계를 위한 '싸움'이 아닌 스스로의 영역확보를 위한 '투쟁'은 피해야 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