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속경제, 우월적 지위의 남용

머니투데이 이철환 하나금융연구소 연구위원(전 FIU원장) 2015.03.2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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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병든 경제의 여러 모습들<3>

종속경제, 우월적 지위의 남용


우리사회에 '갑을관계'라는 용어가 널리 통용되고 있다. 원래 갑과 을은 계약서상에서 계약 당사자를 순서대로 지칭하는 법률 용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보통 권력적 우위인 쪽을 '갑', 그렇지 않은 쪽을 '을'이라 부르고 있다. 여기서 "갑을관계를 맺는다"는 표현이 생겼으며, 지위의 높고 낮음을 의미하게 됐다. 지금은 대기업과 협력업체, 업주와 종업원, 상사와 직원, 고객과 서비스업체 사이까지 이 표현이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이 갑을관계가 우리사회에 광범위하게 작동하고 있지만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장은 경제계라 할 것이다. 즉 제조업체와 건설업체에서의 원청업자와 하청업자간의 관계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대기업은 협력관계 내지 하청관계에 있는 중소기업에 대해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소위 말하는 '갑과 을'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자연히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가는 그 중소기업은 문을 닫을 수도 있다.



이러한 갑의 횡포현상은 우리 경제가 압축성장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졸부근성과 전근대적인 계층의식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즉 돈이나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합리적이고 수평적이며 상식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약자에게 함부로 대하면서 빚어지는 몰상식적인 현상인 것이다.

/삽화=임종철 디자이너/삽화=임종철 디자이너
우리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횡포사례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납품단가 후려치기이다. 대기업에 물건을 납품하는 중소기업에게 납품단가를 심하게 낮게 책정하도록 강요한다. 이런 현상은 특히 대기업이 운영하는 할인마트와 그곳에 납품하는 중소제조업체 간에 자주 일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대기업들은 납품되는 물건의 원가가 인상되어도 이를 납품가격에 제대로 반영해주지를 않고 있는 실정이다.

둘째, 충분히 현금으로 결제할 능력이 되는데도 3개월 또는 6개월 만기인 어음으로 끊어주고 있다. 현찰이 급한 중소기업은 그 어음을 사채업자에게 수수료를 떼고 현금으로 바꾸게 되는데 그만큼 손해를 보게 된다. 대신에 대기업은 그 기간만큼의 이자를 고스란히 따먹고 있다.

셋째, 특허권 침해문제이다. 중소기업이 대박 아이템을 출시하면 대기업이 그것을 모방해서 만든 유사제품 또는 기술로 중소기업의 목을 죈다. 그리고 중소기업이 원천기술을 싸게 넘기지 않을 수 없도록 손을 쓴다. 만약 중소기업이 소송이라도 걸려는 낌새가 포착되면 엄청난 자금력으로 중소기업을 굴복시킨다.


넷째, 부당내부거래 문제이다. 하도급납품 거래를 특정 계열사에 집중시킴으로써 시장의 가격구조를 왜곡시키거나, 비계열사의 사업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1차적 폐해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재벌 총수의 친인척이 대주주로 있는 계열사(주로 비상장 계열사)에 물량을 몰아주거나 가격조작을 통해, 단시간 안에 경영권 승계에 필요한 종자돈을 챙기도록 하는 데 활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부당내부거래 행위의 전형은 일감몰아주기 방식이다. 그동안 대기업 계열회사는 동일 기업집단에 속한 다른 계열회사에 일감을 몰아주고, 그 일감을 수주 받은 계열회사는 별다른 역할 없이 중소기업 등에 일감을 위탁하여 중간에서 이익을 취하는 거래관행이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거래방식은 대기업 계열회사에게 부당하게 경쟁상 우위를 주는 것이다. 이로 인해 모기업인 대기업은 내부거래에 따른 물량에 안주해 경쟁력이 약화되고, 하청기업인 비계열 중소기업은 원천적으로 사업의 기회가 박탈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일감몰아주기 행위가 그동안 규제의 사각지대에 있었다. 이를 차단하기 위해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대한 법률'(이하 '공정거래법')이 2013년 7월 개정됐다.

다섯째, 대기업이 아예 스스로 제빵, 장갑, 순대 장사와 같은 소규모 영세상인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경우이다. 이를 방지하기위해 정부에서는 중소기업 적합업종제도를 만들었지만, 이를 거스르는 대기업도 종종 나타나 사회적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한편 유통업체에서도 갑의 횡포는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본사와 가맹업체 간의 프랜차이즈(franchise)시스템이다. 이는 상호, 특허 상표, 기술 등을 보유한 프랜차이저(Franchisor, 본사)가 프랜차이지(franchisee, 가맹점)와 계약을 통해 상표의 사용권, 제품의 판매권, 기술 등을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시스템이다. 이 과정에서 갑의 위치에 있는 본사는 을의 위치에 있는 가맹점에게 각종 횡포를 부리고 있다.

물론 '을'을 보호하기 위해 '공정거래법'과'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이하 '하도급법') 등이 존재하지만, 현실은 을의 위치에 있는 개인과 기업들은 갑의 사후보복이 두려워 법에 호소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청업체들은 대기업들에 목을 매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억울하고 화가 나지만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대기업의 후려치기를 감내해야 한다. 이런 구조에서 중소기업이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같이 다수의 대기업들은 아직도 협력업체들을 자기들 성장발전의 희생양으로 간주하고 횡포를 부리고 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중소기업은 결국 도산하고 말 것이다. 이 경우 수많은 근로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리게 되고, 종국에는 대기업 자신에게도 부메랑이 된다. 이는 중소기업이 우리나라 전체 기업에서 기업체수 기준 90%, 종업원 수 기준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대기업의 국제 경쟁력을 기대하기 어렵고, 또 강소기업도 나올 수가 없다.

이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균형성장은 지속적인 경제사회발전을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중소기업육성 시책이 만병통치약은 분명 아니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균형성장은 반드시 필요하다. 특정 대기업의 경제력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은 국가 뿐 아니라 이들 기업에도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다. 개별기업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클 때 오히려 국가에 재앙이 될 수 있음은 핀란드의 '노키아' 사례에서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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