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챔피언' 난립, 이대론 안된다…정치권 문제제기

머니투데이 배소진 이현수 , 그래픽=이승현디자이너 기자 2015.03.20 09:15
글자크기

[the300]['히든챔피언, 히든 리스크'](종합)

'히든챔피언' 난립, 이대론 안된다…정치권 문제제기


지난해 금융권을 떠들썩하게 했던 '모뉴엘 사태'에 이어, 우양에이치씨가 상장폐지되는 등 '히든챔피언' 제도가 지속적으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정부 각 부처와 정책금융기관들이 경쟁적으로 막대한 정책자금을 지원하는 상황에 대해 예산을 다루는 국회에서도 제도의 난립과 관리감독 부실에 대한 문제제기가 본격화할 움직임이다.



19일 국회에 따르면 전날 열린 국회 창조경제활성화특별위원회에 참석한 부좌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중소기업청장을 상대로 한 질의에서 "히든챔피언 기업 선정 과정에서 문제 있는 기업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기청이 국내 중소·중견기업의 역량을 강화해 글로벌 전문기업으로 만들겠다며 '히든챔피언 육성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선정된 기업들이 폐업하거나 대표 배임·횡령 등의 문제로 주식거래 정지되는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기청이 2011년 사업 대상기업으로 선정한 자동차 부품업체 캐프는 신임 경영진이 창업주를 배임·횡령혐의로 고소한 상태다. 2013년 선정된 전자저울업체 카스 역시 대표이사 횡령사건으로 현재 주식거래가 중지됐다.



태양광 웨이퍼 제조업체인 네오세미테크는 분식회계로 2010년 상장폐지됐고, 제조업체인 한진피앤씨, 기륭전자, 지우미디어, 지더블유, 동현전자는 지난해 모조리 폐업의 길을 걸었다.

한국수출입은행이 육성하고 선정하는 '한국형 히든챔피언'사업도 대표적인 논란의 대상이다.

수은이 2013년 히든챔피언 육성대상자로 선정한 업체 플랜트설비업체 우양에이치씨는 지난 4일 만기가 도래한 127억원 규모 전자어음을 결제하지 못해 최종 부도처리됐고, 17일 상장폐지됐다. 지난 1월 상장폐지된 터치스크린 생산업체 디지텍시스템스 역시 수은이 선정한 히든챔피언 육성대상자였다. 지난해 사기대출로 물의를 빚었던 모뉴엘은 수은이 2012년 '히든챔피언' 인증기업으로 선정한 곳이다.


박원석 정의당 의원실이 수은으로부터 제출받아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수은의 '히든챔피언' 사업의 경우 지금까지 선정이 취소된 29개 업체 중 기업 구조조정에 들어갔거나 분식회계 혐의를 받은 곳은 7곳이다. 또 당기순손실이 지속되거나 부채비율이 높아지는 등 재무성과가 부진해 탈락한 업체가 6곳이다. 지난 2월말 기준 이들 취소기업들에 대한 수은의 여신잔액은 총 2328억원에 달한다.

우량 중소기업에 대한 인증과 지원정책은 지난 정부에서도 존재했다. 그러다 박근혜정부가 중소·중견기업 육성을 통한 '창조경제'를 주창하면서 각 부처는 경쟁적으로 히든챔피언 육성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동안 시행된 제도만 △글로벌강소기업(중소기업청) △월드클래스300(중소기업청) △글로벌전문기업(산업통상자원부) △한국형 히든챔피언(수출입은행) △프론티어 챔프(정책금융공사) △KDB 글로벌 스타(산업은행) △신보스타기업(신용보증기금) △수출강소기업 Plus+500(기업은행) △K-sure 글로벌성장사다리(한국무역보험공사) △코스닥 히든챔피언(한국거래소) 등이다. 여기에 시중 은행권의 지원 프로그램까지 더하면 10여개가 훌쩍 넘는다.

대부분 수출위주의 중소·중견기업을 대상으로 대출 한도 및 금리 우대, 수출신용보증, 해외마케팅 및 컨설팅 등을 지원한다. 각 기관마다 대동소이한 기준으로 이름만 다른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셈이다.

정부도 '수요기업 혼선과 재정집행 비효율이 우려된다'는 지적에 따라 지난해 10월 산업부와 중기청이 개별적으로 운영했던 사업을 통합, 성장 단계별로 지원하겠다는 '한국형 히든챔피언 육성 대책'을 새로 발표했다. 그러나 산업부와 산업은행으로 통합된 정책금융공사 소관을 제외한 나머지 사업들은 여전히 각 기관별로 유지되고 있다.
제도는 많지만 혜택을 받을 정도로 요건을 갖춘 업체는 한정돼 있어 '겹치기 지원'도 상당수다.

중기청의 '월드클래스300'에 선정된 업체는 R&D(연구개발) 자금으로 5년간 최대 75억원을 지원받는 동시에 수은, 무역보험공사, 산업은행, 신용보증기금 등이 운영하는 각종 프로그램에 우대를 받는다. 신청시 가점을 주거나 신청자격 요건 및 재무요건 심사를 면제해주는 식이다. 한 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는 이력이 다른 기관에 '보증'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예산중복도 문제지만 자칫 부실기업이 선정될 경우 연쇄적으로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기관마다 내세운 목표치를 채우려 경쟁하다보니 애당초 재무상태가 열악하거나 성장잠재력이 높지 않은 업체까지 무리하게 지원 대상에 포함시키고, 손해를 자초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박원석 의원실 관계자는 "실적을 위해 대상 업체를 찾아다니며 심지어 먼저 돈을 빌려준다고 제안하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수은 히든챔피언 선정에서 취소된 기업 29곳 중 절반 이상인 16곳은 금융지원 사용계획이 없어 스스로 탈퇴를 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대상기업 선정에 문제가 있다는 것 얘기"라고 꼬집었다.

여당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지난달 13일 '히든챔피언과 미래산업, 독일에서 배우다'를 주제로 국회에서 열린 '크로스파티 토론회'에서 김세연 새누리당 의원은 "중소기업에 머물러 혜택을 계속 받으려는 이른바 '중소기업 피터팬증후군'에서 탈피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정책을 펴야 한다"고 지적했다.

히든챔피언 '눈먼돈' 타내기…선정에서 관리까지

쓰러진 히든챔피언들은 배임, 횡령, 분식회계로 얼룩져있다. 실패의 원인이 기업환경의 어려움이 아닌 명백한 범죄라는 점에서, 히든챔피언 선정기관의 평가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이들 기관은 어떤 기준을 토대로 히든챔피언 육성 기업을 선정했을까.

19일 국회 창조경제활성화특별위원회 소속 부좌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에 따르면, 히든챔피언 선정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와 중소기업청은 '4단계 심층평가'로 기업을 선발한다. 요건심사, 분야평가, 현장확인과 종합평가가 그것이다. 그러나 현장확인은 시설을 확인하는 수준에 그쳐 사실상 서류 위주의 심사가 이뤄진다는 게 부 의원의 지적이다.

'히든챔피언' 난립, 이대론 안된다…정치권 문제제기
서류심사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분야평가의 세부 지표는 한눈에 보기에도 주관적이다. 수출부문에선 수출확대 계획의 '적극성'을 따지고, 기술부문에선 미래 확보기술에 대한 '이해'를 묻는다. 투자부문에선 투자요인의 '치밀성'을, 경영부문에선 CEO의 '경영철학'과 '성장의지'를 보는 식이다.

중소기업청은 특히 최종단계인 종합평가에서 CEO의 도덕성 기준을 '반성 없는 기업, 선정시 언론으로부터 지탄받을 가능성이 높은 기업'으로 정했다. 중기청은 그 예시로 '구미 불산사태 원인 제공기업의 경우, 자구계획이 우수하더라도 언론에 비판받을 리스크를 감안해 탈락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명시했다.

다른 히든챔피언 선정기관들의 기준도 대동소이하다.

박원석 정의당 의원실에 따르면 수출입은행은 기술력, 성장잠재력, CEO역량, 재무건전성 등 4개 기준을 잣대로 육성기업을 뽑는데, 모뉴엘 사태 이후 부랴부랴 CEO평가 비중을 확대했다.

그러나 모뉴엘 대표는 학력과 경력을 바탕으로 CEO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에, 바뀐 기준에서도 얼마든지 통과가 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선정기관마다 기준이 비슷하다보니 똑같은 서류로 중복지원을 받는 문제도 생긴다.

선정기관들이 사후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점도 히든챔피언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 오제세 새정치연합 의원의 지난해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모뉴엘 사태 이전 수출입은행의 히든챔피언 사후관리 인력은 4명에 불과했다. 1인당 관리 기업 수가 73개에 달한다.

이와 관련 이덕훈 수출입은행장은 지난 1월 "대상 기업 지정과 육성, 사후관리의 모든 과정을 재점검하고 있다"며 "계량지표에선 매출 기준을 손보고 정성 평가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정화 중소기업청장은 지난해 10월 "제2의 모뉴엘이 나오지 않도록 정책을 보완하겠다"며 사후관리 강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부좌현 의원은 "중소·중견기업의 경우 대표나 임원진의 의지와 역량이 기업 성패를 좌우하는 경향이 크다"며 "지원기업 평가과정에 서류 검증 외 부분을 보완하고, 대표나 임원진에 대한 도덕성을 검증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회 문턱 못 넘은 상증법, '히든 챔피언' 육성 차질?

정부가 장기간 가업을 이어가며 사회에 공헌하는 기업을 발굴해 '명문 장수기업'으로 지정, '한국형 히든챔피언'으로 육성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부의 세습’논란을 넘어 관련 법안이 이 법제화 되기까지는 갈 길이 먼 상태다.

19일 중소기업청과 국회 등에 따르면 독일의 '히든챔피언'처럼 수십년간 가업을 이어가며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모범 기업을 선정해 지원하는 '명문장수기업 확인제도' 도입을 위한 중소기업진흥법 개정안(이진복 새누리당 의원 대표발의)이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법안소위에 계류 중이다.

또 명문장수기업에 세제혜택을 주는 내용을 담았던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이 지난해 말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이에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에 담겨 통과됐던 일부 내용마저 모법에 따라 삭제되며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간 상태다.

중소기업청은 당초 해당 법안이 지난해 말 통과될 것을 전제로 명문장수기업 확인제도를 올해 5월 시행한다는 계획이었으나, 법안 처리가 5개월 이상 미뤄지면서 계획도 연내 시행으로 늦춰졌다.

'명문장수기업 확인제도'는 경제적·사회적 기여와 업력을 핵심 지표로 선정해 이를 만족시키는 기업을 명문장수기업으로 인정하고, 연구개발(R&D)·수출·인력·정책자금 등에서 정부 지원과 세제 우대 혜택을 주는 것을 골자로 한다.

현재 기재위 여당 간사인 강석훈 새누리당 의원이 다시 발의한 상증세법 개정안에는 기존과 동일하게 명문장수기업의 가업상속 공제 한도를 현행 최대 500억원에서 1000억원으로 확대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명문장수기업 선정 기준으로는 경제적·사회적 기여와 업력을 핵심 지표로 마련했다. 최소 업력은 30년으로, 그중에서도 2세 경영인이 10년 이상 계속 경영해야 한다. 또 최근 3년간 평균 110%의 신규고용을 창출하고, 매출액·유형자산 증가율도 5년간 업종 평균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 이밖에 최근 3년간 법규 위반이 없어야 하고, 기업 만족도, 노사 관계, 대기·수질 오염 감축, 산업재해 안전교육 등에서도 까다로운 요건을 갖춰야 한다.

그러나 지난해 산업위 법안소위에서는 명문장수기업에 세제혜택을 주는 것이 부의 세습을 부추길 수 있다는 비판에 논의가 중단됐다. 이후 지난 2월 임시국회에서는 산업위 법안소위가 열리지 않았으며 오는 4월에도 자원외교 특위 청문회 등 현안에 밀려 안건에 올라갈수 있을지 미지수다.

기재위 조세소위 역시 마찬가지다. 가업상속공제 혜택의 확대가 부의 되물림이라는 야당의 반대가 거셌고 본회의에서 일부 여당 의원들까지 반대표를 던졌던 만큼 4월 임시국회 안건으로 다시 올리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게다가 연말정산 후속책 등 우선 논의해야 할 법안이 쌓여있다.

중소기업청 관계자는 "명문장수기업 확인제도는 기업인들의 자부심을 고취시키고 기업문화를 선도할 롤모델을 만들어가는 것이 목적"이라며 "우선 상증세법과 상관없이 중소기업진흥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제도를 시행시키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명문장수기업 인증절차가 매우 까다롭기 때문에 기업들의 지원을 독려하기 위한 인센티브 차원이 세제 지원 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며 "법안이 통과되는 대로 이르면 상반기 늦어도 연내에 시행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이라고 설명했다.

"너의 치약튜브는 내가 만든다"…우리 곁의 히든챔피언들

"당신이 뉴욕에서 오페라를 구경하고 있든, 밀라노의 스칼라극장에 앉아 있든, 파리의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에 앉아 있든, 그 곳의 무대 극장막은 '게리츠(Gerriets)'에서 만든 것이다."

독일의 경영학자 헤르만지몬(Hermann Simon) 교수가 자신의 저서 '히든챔피언(Hidden Champion)'에서 소개한 기업 '게리츠'다. '엄청나게 큰 극장막'을 생산하는 곳은 세계에서 게리츠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세계시장 점유율 100%를 자랑한다는 게 지몬 교수의 설명이다.

지몬 교수가 제시한 히든챔피언의 조건은 게리츠와 같이 △각 분야에서 세계시장 점유율 1~3위 또는 소속 대륙에서 1위를 차지하는 기업이다. 동시에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기업 △매출액이 40억 달러 이하인 기업이어야 한다. 요약하자면 규모는 작지만, 기술력과 품질을 앞세운 세계적 기업이다.
'히든챔피언' 난립, 이대론 안된다…정치권 문제제기
지몬 교수에 따르면 2012년 말 기준 세계 2734개의 히든챔피언 중 독일 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절반에 가까운 1307개다. 게리츠 외에도 쌍둥이칼로 유명한 헹켈(Henckels), 애완동물 목줄업체 플렉시(Flexi), 압정업체 고차크(Gottschalk), 180년 전통의 종이회사 그문트(Gmund), 가전업체 밀레(Miele) 등이 이에 속한다.

1731년 창립한 헹켈은 300년 가까이 '주방용 칼'이라는 한 가지 제품에만 집중해, 경쟁사가 따라잡기 어려운 명품업체로 자리 잡았다. 오랜 기간 다듬어진 합금과 열처리 기술을 앞세워 시장을 평정한 예다. 플렉시는 애완용 목줄 부문에서 세계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다. 고차크는 하루 1200만개 압정을 생산해 300개 브랜드로 수출한다.

독일 외에도 영국에는 위조화폐 방지 보안종이 업체인 '드라뤼( De La Rue)'가 있는데, 150개 국가가 드라뤼의 제품을 이용해 화폐를 만든다. 인도의 치약튜브 회사인 '에셀프로팩(Essel Propack)'은 전 세계 45개의 공장을 두고, 세계시장 점유율 33%에 달하는 튜브를 생산한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의 히든챔피언은 독일의 50분의 1수준인 23개에 불과해, 일본(220개), 중국(68개)보다도 뒤처진다. 모두 제조업체로, 헤어기기 업체인 유닉스전자, 절삭공구회사 YG-1, 오토바이 헬맷업체 HJC, 오토바이 경기복 제조업체 한일, 완구회사 오로라월드, 40년간 손톱깎이를 만들어 온 쓰리세븐 등이 대표적이다.

1978년 만들어진 유닉스전자는 머리카락에 웨이브를 넣는 고데기와 헤어드라이어로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현재 연간 400만개 헤어드라이어를 북미 시장에 수출할 정도로 독보적이라는 게 업계 평가다. YG-1은 기계부품 절삭공구 시장에서 세계시장 점유율 14%를 차지하는 등 선두권에 들어있다. 전체 매출액의 70% 이상이 수출에서 나올 정도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