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왕의 얼굴’은 특이하게도 관상을 소재로 삼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드라마에서 관상은 개인의 얼굴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백성의 열망을 꿰뚫어보는 통찰이다. 선조의 서자로 태어난 광해군은 원래 왕이 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정실왕비에게서 난 적자가 아니었을 뿐더러 위로 서자 중 맏형인 임해군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임진왜란 중에 분조(分朝)를 이끌면서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고 왕위에 오른다. 왜군을 맞아 도망가기 바빴던 부왕과 달리, 세자가 된 광해는 백성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그에게 분조를 맡긴 것은 어찌 보면 미끼로 삼기 위함이었다. 자신이 명나라로 도피할 동안 왜군을 현혹하며 시간을 벌어주길 바란 것이다. 다른 왕자들도 있었지만 남달리 총명하고 나이도 제법 찬 광해가 적임자였다. 그런데 광해군은 선조의 기대를 뛰어넘어 실질적인 왕의 소임을 수행한다. 그는 백성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국난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곁을 지키는 일이었다. 광해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왜군과 도적이 들끓는 곳을 종횡무진하며 민심을 수습했다. 나라가 망한 줄 알고 우왕좌왕하던 난민들은 세자의 출현만으로도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 그가 이르는 곳마다 백성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군주로서 광해군은 백성의 처지를 헤아린 임금이었다. 대동법을 시행해 공납의 폐단을 바로잡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는 현물 대신 토지 결수에 따라 백미를 징수하도록 했다. 이는 넓은 땅을 보유한 양반은 더 많이 내고, 코딱지만한 논밭을 일구는 농민은 조금만 내는 공평한 과세방안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특권을 누려온 양반들은 불만이 쌓여갔다. 게다가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펼치자 양반사회는 들끓었다. 더 이상의 전란을 막으려는 고육지책이었지만, 양반들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워 임금을 공격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광해군이 폭군이냐 아니냐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역사인물의 선악은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역사기록은 대개 승자의 편에 서있고, 엄밀히 말해 폭군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광해가 나중에라도 여러 세력을 두루 포용하며 균형을 잡는 데 힘썼다면 최소한 폭군의 서글픈 낙인이 찍히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권력자는 편향된 인의 장막에 둘러싸이는 순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억울한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