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폭군, 광해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2015.01.10 05:02
글자크기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18. 광해군 : 백성의 희망에서 폭군으로 추락하다

만들어진 폭군, 광해


“백성의 얼굴이 곧 군주의 얼굴이다.”

사극 ‘왕의 얼굴’은 특이하게도 관상을 소재로 삼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드라마에서 관상은 개인의 얼굴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백성의 열망을 꿰뚫어보는 통찰이다. 선조의 서자로 태어난 광해군은 원래 왕이 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정실왕비에게서 난 적자가 아니었을 뿐더러 위로 서자 중 맏형인 임해군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임진왜란 중에 분조(分朝)를 이끌면서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고 왕위에 오른다. 왜군을 맞아 도망가기 바빴던 부왕과 달리, 세자가 된 광해는 백성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그에게 분조를 맡긴 것은 어찌 보면 미끼로 삼기 위함이었다. 자신이 명나라로 도피할 동안 왜군을 현혹하며 시간을 벌어주길 바란 것이다. 다른 왕자들도 있었지만 남달리 총명하고 나이도 제법 찬 광해가 적임자였다. 그런데 광해군은 선조의 기대를 뛰어넘어 실질적인 왕의 소임을 수행한다. 그는 백성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국난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곁을 지키는 일이었다. 광해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왜군과 도적이 들끓는 곳을 종횡무진하며 민심을 수습했다. 나라가 망한 줄 알고 우왕좌왕하던 난민들은 세자의 출현만으로도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 그가 이르는 곳마다 백성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전란이 끝날 무렵 광해는 백성의 희망이 되어 있었다. 반면 비겁한 처신으로 백성의 신뢰를 잃은 선조에게는 그가 눈엣가시였다. 왕위를 직접적으로 위협한다는 점에서 전쟁영웅 이순신보다 더 위험한 정적이었다. 못난 아비는 잘난 아들을 제거하기로 했다. 의인왕후가 죽자 선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계비(훗날의 인목대비)를 맞고 영창대군을 낳았다(1606년).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북인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으로 분열했다. 왕과 소북의 공세 속에 광해도 벼랑 끝에 몰렸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왕의 갑작스런 유고로 세자가 왕위에 오른 것이다.

군주로서 광해군은 백성의 처지를 헤아린 임금이었다. 대동법을 시행해 공납의 폐단을 바로잡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는 현물 대신 토지 결수에 따라 백미를 징수하도록 했다. 이는 넓은 땅을 보유한 양반은 더 많이 내고, 코딱지만한 논밭을 일구는 농민은 조금만 내는 공평한 과세방안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특권을 누려온 양반들은 불만이 쌓여갔다. 게다가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펼치자 양반사회는 들끓었다. 더 이상의 전란을 막으려는 고육지책이었지만, 양반들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워 임금을 공격했다.



광해는 그렇게 양반의 적이 되어갔다. 총대는 서인들이 맸다. 그들은 양반의 적을 백성의 적으로 만드는 효과적인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도덕적 매장이었다. 1623년 서인들은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자행한 부도덕한 폭군을 응징하겠다며 인조반정을 일으킨다. 국모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어린 동생 영창대군을 살해한 죄를 묻겠다는 것이었다. 광해군 즉위 초에 집권당 대북이 밀어붙인 패륜이 뒤늦게 반정의 명분으로 쓰인 셈이다. 여기에는 임금의 책임도 있었다. 대북 영수 정인홍이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이첨 등 강경파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대북은 남명 조식의 직계로 퇴계 이황을 추종하는 대다수 사림에게 이단취급을 받고 있었다. 더구나 집권 후 서인, 남인, 소북을 배제하고 독주하는 바람에 정치적으로도 고립된 상태였다. 반정은 양반사회의 지지 속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광해군이 폭군이냐 아니냐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역사인물의 선악은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역사기록은 대개 승자의 편에 서있고, 엄밀히 말해 폭군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광해가 나중에라도 여러 세력을 두루 포용하며 균형을 잡는 데 힘썼다면 최소한 폭군의 서글픈 낙인이 찍히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권력자는 편향된 인의 장막에 둘러싸이는 순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억울한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한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