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람보'를 꿈꿨던 예비역 중사의 못다한 이야기

머니투데이 이원광 기자 2014.12.2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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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여담]

서울 은평경찰서는 은평구 일대에 군 연습용 수류탄 신관 2개를 놓아두고 폭발하게 한 혐의로 예비역 중사 김모씨(40)를 구속했다고 27일 밝혔다./ 사진=서울 은평경찰서 제공서울 은평경찰서는 은평구 일대에 군 연습용 수류탄 신관 2개를 놓아두고 폭발하게 한 혐의로 예비역 중사 김모씨(40)를 구속했다고 27일 밝혔다./ 사진=서울 은평경찰서 제공


'주차하던 차 밑에서 수류탄이 폭발한다면?'

현대판 '람보'가 서울 시내에 나타났습니다. 전직 부사관이었던 김모씨(40)는 지난 23일 새벽 0시30분쯤 책장에 보관하던 케이크 상자를 들고 집을 나섭니다. 상자 안에는 연습용 수류탄 2개, 최루탄 1개가 들어있었습니다.

김씨는 무작정 걷기 시작합니다. 서울시 은평구부터 불광역, 연신내역 등을 거쳐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까지 무려 10여㎞ 구간을 걸어다니며 수류탄 설치장소를 물색합니다. 그리고 첫 범행 장소로 차량 뒷바퀴를 선택합니다. 김씨는 서울 은평구 대조동 한 자동차 영업소 앞 주차된 차량 뒷바퀴에 안전고리를 제거한 연습용 수류탄을 놓아둡니다.



근접 전투용 소형 폭탄인 수류탄은 아군 진영의 폭발 위험성을 방지하기 위해 안전손잡이와 안전고리, 안전클립 등 총 3가지 장치를 가집니다. 안전클립과 손잡이는 쉽게 떨어지기 때문에 안전고리를 제거하면 작은 충격에도 폭발하게 됩니다. 사람이나 물체가 건드리면 폭발하도록 만든 일종의 '부비트랩'이었던 셈이죠. 결국 다음날 오전 8시 해당 수류탄은 후진하던 차량 바퀴에 눌려 폭발하게 됩니다.

두 번째 장소는 건물 문틈 입니다. 이 역시 '사람이 건드리기 쉬운 기구나 장소에 수류탄이나 지뢰 등의 폭발물을 직접 장치하거나 철사와 같은 것으로 연결해놓는다'는 부비트랩의 정석을 따랐습니다. 서부버스터미널의 한 금은방 문틈에 설치된 수류탄은 이날 낮 12시 주인이 문을 열며 건드리자 폭발하게 됩니다.



투척용 수류탄을 '부비트랩' 식으로 설치했다는 점이 관심을 모았습니다. 경찰 조사결과 김씨는 중사로 전역한 전직 부사관으로 경기도의 모 부대에서 복무하던 2002년 7월쯤 부대 내 배수로 공사 작업을 하다가 최루탄 1개와 연막탄 2개, 연습용 수류탄 신관 6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후 땅속에 묻었다가 2003년 9월 전역 시 반출해 집에 보관해 왔던 것이죠.

김씨의 범행은 술김에 벌인 일종의 '화풀이'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지난 22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길거리에서 무단횡단을 시도하다 급정차한 택시 기사와 시비가 붙어 폭행한 혐의로 마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후 합의금 300만원을 요구받아 홧김에 이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김씨가 술을 마신 배경에 눈길이 갔습니다. 김씨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병사로 군에 입대한 뒤 '말뚝'을 박기로 결심합니다. 김씨는 경찰조사에서 "고졸이 사회 나와서 할 게 있겠느냐"며 "차라리 군 복무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 장기복무를 지원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찌감치 전역해 사회로 나오게 됩니다. 어렵사리 자격증을 취득해 간호조무사로 2년간 근무를 했으나 병원장이 일찍 세상을 뜨면서 병원이 폐업하자 다시 실업자 신세가 됩니다.


이후 방황하던 김씨는 친척의 추천으로 한 전기회사에 5년 동안 근무합니다. 그러나 오래 근무해도 적은 임금이 계속되자 퇴사를 결심합니다. 실망도 잠시. 이번엔 제빵사의 꿈을 키웁니다. 제빵사 지망생들과 미래를 이야기하며 술을 한잔 기울인 뒤 횡단보호를 건너가려다 택시기사와 실랑이를 벌입니다. 폭행 혐의로 경찰조사를 받은 날은 제빵학원 수료 하루 전날이었습니다.

최근 군피아가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초급 간부들의 형편은 이와 크게 다릅니다. 국방부에 따르면 장기복무 제대군인의 재취업 현황 조사결과 지난해 12월31일 전역자 3만160명 가운데 1만7417명이 재취업해 취업률은 57.8%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해 취업률은 36.1%, 2012년 취업률은 58.1%이었습니다. 전역한 직업군인의 절반 가량이 사실상 백수인 셈인 것이죠. 중사로 전역했다 다시 부사관 후보생이 된 하사 A씨는 "군 복무 중 익힌 전문성이란 게 사실 일반 사회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현대판 람보를 꿈꿨던 김씨의 일탈은 해프닝으로 끝났습니다. 수류탄이란 용어가 주는 위험성과 달리 연습용 수류탄은 폭발력이 미비해 살상은커녕 부상을 입히기도 여의치 않습니다. 기자가 강원도 모 사단 신병교육대에서 복무 당시 한 훈련병이 연습용수류탄을 손에 쥔 채 폭발한 바 있으나 손에 검은 그을음만을 남겼을 뿐입니다. 서울시민을 공포에 몰아넣었다던 수류탄 설치 사건. 사실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주고 싶었던 예비역 중사의 일탈이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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