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에서 온 '바리공주'의 감사편지

머니투데이 박강태 이로운넷 공동대표 2014.12.19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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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머니, 사회적 경제의 눈]바리의꿈과 고려인 로지나서당 아이들

편집자주 사회적 경제는 자본보다는 사람, 수익보다는 가치가 중심이 되는 경제 즉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경제활동을 뜻한다. 여야는 정부나 기업이 해소할 수 없는 사회 문제를 사회적 경제로 해소하자며 각각 사회적경제기본법안을 발의했다. 여야의 전망대로 올해 안에 이 법이 제정되면 한국은 아시아 최초로 사회적 경제에 법적 실체를 부여하는 국가가 된다. 머니투데이는 국내외 사회적기업·협동조합·비영리단체·소셜벤처 등 사회적 경제 현장 활동가들의 소식과 최신 동향을 전하면서 사회적 경제의 시대를 준비하고자 한다.

연해주에서 온 '바리공주'의 감사편지


바리데기 설화를 혹시 아는가? 원래 바리데기는 대왕의 딸이었다. 왕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7번째 딸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버린 아비가 병들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천신만고 끝에 불사약을 구해와 이미 죽은 아비를 살리고 바리공주가 된다.

조선 후기의 가난과 일제의 핍박을 피해 연해주로 건너간 고려인의 역사는 바리데기를 닮았다. 연해주 고려인들이 독립운동의 기반을 제공하자 이들이 골치 아파진 구 소련은 1937년 ‘일본의 첩자’라는 누명을 씌워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소련 붕괴 후 연해주 고려인의 누명은 벗겨졌지만 고향과 친척을 찾아 돌아온 연해주에서 생계 기반을 다시 만들기란 어려웠다.



지난달 3일 파주의 한 리조트에서 이들이 노래하고 춤 추는 색다른 파티가 열렸다. 로지나서당 등 러시아 연해주 고려인 한글교육센터 50여 명의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그동안 이들을 도왔던 국내 단체들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였다.

분위기는 마치 우리네 시골학교 축제 같았다. 고려인과 우리가 같은 민족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이들의 노래와 춤은 낯설지 않았다. 관객들의 얼굴마다 훈훈한 감동이 가득 넘쳤다.



분위기가 무르익은 막바지 무렵 한 아이가 고려인 지원과 협력에 대한 감사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아이는 우리말이 서툴렀다. 그래도 아이는 편지를 끝까지 읽어냈다.

아이는 “저희에게 좋은 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와 새로운 학교버스도 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한다”고 했다. 덕분에 “학교가 정말 예쁘고 귀엽고 좋아졌다”며 “요즘 예쁜 교실에서 공부 하는 것이 정말 즐겁다”고 말했다.

아이의 낭독이 끝나자 장내에 환호와 박수가 한 동안 이어졌다. 러시아의 고려인 아이들과 그들의 소중함을 익히 알고 있는 내국인들의 진한 연대감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쑥스러워하던 그 아이의 눈에 비친 동포들의 환호는 마치 동영상처럼 촬영되어 평생 잊지 못 할 추억의 파일로 가슴에 저장되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역시 그 아이와 같은 감동어린 추억을 얻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바리공주’가 되어줄 바리데기들에 대한 생각이 나처럼 깊어졌으리라.

국내엔 바리데기 설화에서 이름을 따온 사회적기업이 있다. 고려인 자립을 위한 경제사업, 교육 및 방문 등 문화교류 사업을 벌이고 있는 '바리의꿈'이다. 바리의꿈은 현지에선 콩 농장과 가공공장을 설립해 고려인들의 마을을 만들고 정착할 수 있게 지원한다.

바리의꿈이 만드는 청국장, 된장 같은 제품은 이미 국내 다양한 온라인쇼핑몰에서 판매되고 있다. 매년 겨울엔 고려인들이 우리 전통 방식으로 띄운 유기농콩 메주가 판매된다. 올해에도 이달 20일까지 예약주문을 받고 있는데, 예약하면 구매가보다 25%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다. 아마 유기농콩 메주가격으로는 가장 저렴한 가격일 것이다.

바리의꿈과 연해주 현지의 동북아평화기금이라는 비영리단체, 이를 지원하는 국내 시민단체 동북아평화연대는 고려인들 협력과 지원을 이끄는 삼각체제다. 한글교육센터의 모국 방문 등 고려인의 러시아 이주 150주년을 기념해 개최된 여러 행사도 이들이 이끌었다.

교황의 한국방문으로 다소 묻히기는 했지만 지난 광복절에 러시아 모스크바를 출발한 고려인들이 북한을 거쳐 판문점을 통해 서울까지 오는 차량 랠리가 있었다. 러시아 고려인, 중국 조선족, 일본 교포의 청소년 축구팀이 강원도 동해에 모여 우리 아이들과 함께 하는 축구대회도 열렸다.

어른들의 역사적인 차량 랠리와 아이들의 5박6일 짧은 방문은 꿈 같이 지나갔고, 돌아간 '바리데기'들은 여전히 추운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이들은 언제 한반도에 '바리공주'로 돌아올 수 있까. 바리의꿈은 콩에서 그 길을 찾았다.

지난해 고려인 유기농콩이 해외농업특례지원제도 대상에 포함돼 국내에서 더 다양한 제품으로 가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자, 바리의꿈은 국내에서 지원군을 모았다. 러시아당국의 유전자변형 반대정책 덕분에 ‘GMO(유전자변형) 0%’의 안전한 콩이자 연해주벌판에서 키운 유기농콩이라 더욱 믿음직한 원료였지만, 이걸 함께 상품으로 개발하고 판매할 파트너를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고려인 자활기반을 더 다지자는 취지에 공감한 서울형 사회적기업 이로운넷과 해피브릿지, 쿠키앤쇼핑, 우리밀급식 푸르나이 등 몇몇 기업이 이에 동참해 협동조합 바리의꿈을 새로 만들었다.

첫 제품인 ‘이로운아침 유기농두유’는 온오프라인의 다양한 판로를 통해 월 7000만 원 안팎의 판매실적을 올리며 유기농두유 시장의 선두주자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내년엔 두부 등 더 다양한 상품이 시도될 예정이다. 이 역시 유기농콩 제품으로는 가장 저렴해 서민들도 먹을 수 있는 가격으로 책정될 것이다.

바리데기 설화처럼 한반도 사람들한테 잊힐 뻔했던 고려인들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콩과 콩 제품을 가져다주고 있다. 밝게 잘 자라준 아이들의 진심어린 미소와 감사라는 얻기 어려운 선물도 나눠줬다.

이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감사의 편지는 우리가 써야 마땅할 것 같다. 연해주에서 온 ‘바리데기들’에게 보냈던 박수와 환호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감사의 편지를 무엇이라 시작해야 할까. 말을 찾기 어려우니, 몸으로 할 일부터 더 찾아봐야겠다. 소비자로서 함께 하고 조합원으로 함께 할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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