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 약속이 늘어날 때마다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유명한 펀드매니저다. 수년 전이었다. 연말에 그 펀드매니저를 후배 한 명과 만났다. 한달 전쯤 약속해놓은 만남이었다. 저녁을 먹는 중에 그 펀드매니저에게 전화가 왔다. 그의 전화 통화는 이런 내용이었다. "그래, 다들 나왔구나. 오늘 난 못 갈거야. 친구들에게 안부나 전해주고. 그래 다음 모임 때는 얼굴 보자. 미리 날짜만 알려줘."
이런 내 생각을 털어놓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냥 약속이 생기면 그 약속 지키고 그 날 다른 약속은 안 잡아요. 약속을 잡아놓은 날 다른 약속이 갑자기 생겨도 선약을 지켜요. 설사 사장이 부르는 자리라도 선약 자리에 가요." 이게 그의 인생 원칙이었다.
어느 목요일 저녁에 약속이 있었다. 그런데 난 다음날 해외 출장이 잡혀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인천공항에 가야 했다. 그 약속은 금융업계에서 친하게 지내던 한 사람과 후배 하나와 나, 단 세 사람의 사적인 자리였다. 미루자고 하면 미룰 수는 있었지만 펀드매니저와 약속에 대한 일화를 겪은 뒤 약속은 되도록 조정하지 않는다는게 내 원칙 비슷하게 됐다. 물론 나는 이 원칙을 그 펀드매니저처럼 철저히 지키지 못한다.
그런데 마침 약속한 업계 사람에게 문자가 왔다. "오늘 저녁 약속 가능하세요?" "네, 그런데 제가 낼 출장이 있어 술은 많이 못 마셔요." "그럼 미루시죠." 약속을 미루자는 그 문자에 나는 잠시 생각하다 전화했다. "전 괜찮아요. 2박3일 출장이라 짐 쌀 것도, 준비할 것도 없어요." "에이, 그래도 미루시죠."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 뭔가 중요한 약속이 생기셨죠?" 그러자 그는 "다른 약속도 있는데요, 또 출장 가신다니까 미루자는 거죠." 다른 약속이 문제였던 것이다. 나는 선선히 "그러시죠"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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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은 때로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항상 우선순위에 따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누구를 언제 만날 것인지 약속하는 것 역시 우선순위에 따른 선택이다. 꽤 중요하다고 생각해 잡아놓은 약속이 우선순위가 더 높은 약속에 의해 교체되는 경우는 종종 생긴다. 이 때 상대방이 나를 어느 정도의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지 드러난다. 모두가 '아이구, 그런 일이 있으면 가야지, 우리 약속이 대수인가'라고 공감하는 일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일도 있다. 따라서 약속은 할 때부터 진지하게 해야 한다. 상대방에 대한 내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시간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어떤 사람을 시간을 내어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최고의 선물이다. 약속 많은 연말연시, 그 약속 하나하나는 우리가 상대방에게, 그리고 상대방이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약속 많은 연말연시, 당신은 어느 곳에서 누구를 만나고 있는지, 그 약속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한번 돌아보길 바란다. 약속이 곧 상대방에 대한 당신의 마음이고 그 약속이 소중한 당신의 인생을 이루는 일부가 되기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