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로 결혼한 일본인 아내에 폭력, 이유 들어보니

뉴스1 제공 2014.09.2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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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전담' 허배석 경장, 화해 이끄는 비결

(서울=뉴스1) 권혜정 기자 =
서울 중부경찰서 가정폭력전담경찰관 허배석 경장(왼쪽)이 가정폭력 피해자를 쉼터로 안내하고 있다. (서울 중부경찰서 제공)  © News1서울 중부경찰서 가정폭력전담경찰관 허배석 경장(왼쪽)이 가정폭력 피해자를 쉼터로 안내하고 있다. (서울 중부경찰서 제공) © News1


"어쩌면 그들은 이야기를 들어 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나는 그들의 메신저입니다."

'마술사'라 불리우는 경찰이 있다.

우리 삶에 가장 깊숙히 들어 와 있는 경찰, 그중에서도 서울 중부경찰서 가정폭력전담경찰 허배석(38) 경장은 그 어떤 경찰보다도 관내 가정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고, 기억하고 있다.



지난 22일 서울 중구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허 경장은 "방금 관내 한 가정폭력 사건을 해결하고 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일본 유학 중 잠깐 귀국한 누나와 남동생의 싸움은 통상 남매간의 다툼을 넘어섰고, 결국 신고를 받고 인근 지구대 경찰이 출동했다.

지구대로 도착해서도 서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던 이들은 허 경장의 30분 설득 끝에 두 손을 꼭 잡은 채 집으로 향했다. 서로에게 흉기를 들이 밀며 싸우던 이들을 순식간에 사이좋은 남매로 만든 허 경장의 마술 아닌 마술에 지구대 경찰관들마저 혀를 내둘렀다.



허 경장의 '마술같은' 능력은 끊임없는 관심과 관리에서 나온다. 실제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1시간 남짓의 짧은 시간에도 그의 핸드폰은 쉴 새 없이 울려댔다.

허 경장은 "현재 가정폭력 문제를 겪고 있어 관리하는 가정만 20가정이 넘는다"며 "카카오톡 등을 통해 수시로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많은 가정의 가해자, 피해자로부터 밤낮없이 "형님", "동생", "경찰관 아저씨" 등의 메시지가 오다보니 허 경장에게 어느새 휴일은 고새하고 밤낮 구분마저 사라졌다.


가정폭력전담경찰로서 '현장 출동'을 원칙으로 삼고 있는 그는 신고가 접수되면, 무조건 현장으로 가 가정폭력 피해자와 가해자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준다.

그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각자의 마음에 진 응어리를 내게 이야기하면 나는 그것을 정리해 서로에게 전달해준다"며 "이른바 '메신저' 역할을 하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가정폭력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밤이고 낮이고 어디라도 '부르면' 달려간 끝에, 실제 법원에 이혼 서류까지 접수했던 한 가정은 최근 "노력해서 잘 살아 보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유학파 출신의 30대 부부는 경제적으로는 여유로웠으나 성격 차이 등으로 인해 끊임없이 부딪혔다. 여자의 잔소리에 남자는 화가 나 물건을 던졌고, 이는 곧 부부싸움으로 번졌다.

지난 5개월 동안 허 경장은 이들 부부와 따로, 또 같이 대화했다. 부부의 세 살배기 딸이 허 경장에게 "경찰관 아저씨"라고 스스럼없이 말할 정도가 된 최근, 부부는 '다시 한 번 잘 살아보자'고 다짐했다.

허 경장은 남편이 보낸 '불안할 것도, 상처될 것도 없이 너그러워집니다. 잘 살아보겠습니다'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여 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가정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허 경장은 메신저 역할 뿐만 아니라 주거 환경을 바꿔주고 직업을 찾아주는 등의 눈에 보이는 노력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종교를 통해 결혼한 일본인 아내와 한국인 남편이 가정폭력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남편이 화가 나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이유는 '집이 더럽다'는 것. 실제 허 경장이 이들 부부의 집을 찾자 냉장고 위에 3㎝ 가량의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부부 슬하에 3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냉장고 안에 먹을만한 음식은 없었다.

허 경장은 대화를 통해 종교에 독실했던 일본인 아내가, 남편이 결혼을 목적으로 잠깐 종교에 몸 담았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실망했다는 점을 알아챘다. 허 경장은 아내와의 긴 대화로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한편, 남편이 폭력을 휘두르는 원인을 제거하기로 했다.

그는 봉사자를 모집해 집을 청소해주고, 지원을 받아 수납장 등의 가구를 마련해줬다. 이같은 노력으로 집이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해지자, 남편은 허 경장에게 진심을 다해 "고맙다"고 말했다.

허 경위는 이같은 관리에 대해 "사실 이런 일까지는 하지 않아도 된다"면서도 "가정폭력 가정에 대한 관리가 신고 당시의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오랜 기간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대화와 인연을 이어갈 구실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주거 환경 개선과 직업 교육 연계, 상담 치료 등은 앞으로 대화를 이어갈 구실 중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서울 중부경찰서 가정폭력전담경찰 허배석 경장이 알코올 중독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한 한 민원인을 병문안하고 있다. (서울 중부경찰서 제공) © News1서울 중부경찰서 가정폭력전담경찰 허배석 경장이 알코올 중독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한 한 민원인을 병문안하고 있다. (서울 중부경찰서 제공) © News1
그러나 수많은 가정폭력 가정들이 이처럼 '화해'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손가락이 붙어 있는 장애를 가진 50대 여성은 20년 전 지금의 남편과 재혼했다. 그러나 재혼과 함께 남편의 폭력이 시작됐고, 매일 술에 쩔어 있는 남편을 대신해 아내는 혼자 생계를 책임졌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지난 20년 동안 악착같이 일한 결과, 아내 앞으로 건물 하나가 생겼다.

그러나 이를 알아 챈 남편은 건물의 명의를 자신 앞으로 돌리라며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사실을 알아 챈 허 경장은 부인의 의사를 존중해 이들 부부의 이혼을 돕기로 했다.

아내를 위해 이혼 전문 변호사를 연결해주고, 남편의 폭력이 무서워 집에 들어 가지 못했던 아내와 함께 집에 들어가 옷가지를 챙겨 나올 수 있도록 했다. 허 경장은 이들 부부의 이혼을 돕는 것은 물론, 상습적으로 폭력을 휘둘러 온 남편에 대한 형사처벌도 고려하고 있다.

허 경장은 "한평생을 막무가내로 살아 온 남편이기에 강력하게 처벌, 다시는 폭력을 휘두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허 경장의 밤낮을 가리지 않는 노력으로 서울 중부경찰서의 가정폭력 재범률은 올해 초부터 0%를 이어가고 있다. 허 경장은 보통의 가정폭력전담 경찰관의 업무가 전화통화와 사무실 안에서의 근무 등으로 한정돼 있다는 점에 따라, '런닝맨' 이라는 현장 중심의 제도를 고안해 운영 중이다. 신고가 들어 오면 무조건 현장을 찾고, 피해자 뿐만 아니라 가정폭력의 원인이 되는 가해자에 대한 관리에 중점을 두는 것이 '런닝맨' 제도다.

그는 "가정폭력의 원인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가해자에 대한 관리가 필수"라며 "동시에 가정폭력 전담경찰관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메신저 역할'을 함으로써 상처 받은 가정들이 행복한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서울 관내 각 경찰서마다 1명씩 존재하는 가정폭력전담경찰 중에서도 보기 드문 '남성' 가정폭력전담 경찰인 허 경장은 "가정폭력 가해자가 아직까지도 대부분 남자인 경우가 많은데, 내가 남자이다 보니 가해자들과 터놓고 이야기하기 편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쩌면 피해자와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허 경장은 "욕심에 열정을 다 해 일하고 있지만 여럿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며 "가정폭력전담 전용 차량과 전용 휴대폰이 생긴다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가정폭력전담 경찰이 됐을 때에도 지금의 관리 가정들과의 연락 체계가 꾸준히 이어질 것 같다"고 소박한 바람을 드러났다.

그러면서 그는 "현재 2인1조로 가정폭력 전담일을 하고 있는데, 벅차긴 하다"며 "주말은 물론, 밤낮도 없다"고 웃어 보였다. 그런 그에게 동료 경찰관들은 '허 형사, 다른 가정보다 본인 가정 챙겨'라고 우스갯 소리를 한다고 했다. 출산을 목전에 앞두고 있는 부인 역시 가끔 볼멘소리를 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빠져들 줄 몰랐다'며 두손 두발을 든 지 오래다.

그는 "부인의 임신 기간 동안 옆에 자주 있어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면서도 "그러나 가정폭력전담 경찰관의 일을 스트레스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오래 이 일을 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술에 잔뜩 취해 전화로 욕설을 퍼붓던 남성을 만나 곧 태어날 아기 옷을 받아 올 정도로 설득에 도가 튼 허 경장에게 실제 한 가정은 "(폭력을 휘두르던) 아들이 이렇게까지 변하다니, 믿을 수 없다. 경찰관님은 마술사가 틀림없다"고 말했다.

가정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경찰로서 맺은 인연이지만 이들과 평생 관계를 이어가고 싶다는 그는 "단순히 경찰과 민원인이 아니라, 아는 형, 아는 동생 등 일반적인 관계로 평생 함께 하고 싶다"며 "그들이 나를 믿고 의지하는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문제가 있었던 사람들이 가정폭력전담 경찰이라는 나를 통해 희망을 갖고, 이로 인해 그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정말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이처럼 알게 모르게 음지에서 노력하는 경찰로 인해 사회가 삐그덕거리면서도 계속해서 돌아가는 것 같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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