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무실 패키지여행 총액표시제, "뭘 보호한다는 건지..."

머니투데이 이지혜 기자 2014.09.25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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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베이징 3박4일 초저가투어... 출발전 10만원 냈으나, 현지에서 또 21만원 내야

/이미지=김지영 디자이너/이미지=김지영 디자이너


지난 9월8일 출발하는 국내 노랑풍선여행사의 베이징 3박4일 상품 가격은 단돈 38만3000원이었다. 왕복 항공 요금을 조금 웃도는 이 금액으로 어떻게 4성급 호텔에서 묵으며 현지 명소들을 두루 둘러보는 것이 가능할까. 이 질문에 직접 답을 얻기 위해 기자는 지난 8일 추석 당일 출발하는 해당 상품을 예약했다.

특히 정부는 해외 패키지 여행상품의 선택 관광 강요 폐단을 막기 위해 지난 7월부터 패키지여행 가격에 총액을 표시하는 '총액표시제'를 도입했다. 이 상품도 필수 관광을 상품가격에 모두 포함시켜 38만3000원으로 총액을 표시한 상품이었다.



베이징 천안문광장. 패키지여행에서도 빠지지 않는 대표 관광지다/사진=이지혜 기자 베이징 천안문광장. 패키지여행에서도 빠지지 않는 대표 관광지다/사진=이지혜 기자
"물을 많이 드시지 마세요. 화장실에 자주 다녀오시면 이동 시간을 맞추기 힘듭니다." 중국 텐진공항에 도착해 전용 버스에 오르자마자 가이드는 베이징 시내까지 2시간 넘게 이동해야 한다며 화장실을 갈 수 없다는 주의부터 줬다.

일부 여행객이 "물도 못 마시게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불만을 내놓자 가이드는 "화물차 진입을 제한하는 새 고속도로를 이용할 것인데 이 도로에는 아직 휴게소나 화장실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고객이 "그럼 왜 베이징공항이 아닌 텐진공항으로 왔느냐?"고 묻자 "베이징은 1시간 , 텐진은 2시간 이동 거리인데 항공료가 더 저렴해 패키지 여행에서는 텐진공항을 주로 이용한다"고 답했다. 그러고는 "어차피 이런 내용은 다 상품에 표기돼 있는데 이제 와서 다른 소리를 하느냐"고 말했다.

팔달령 만리장성엔 케이블카(오른쪽)가 설치돼 있어 관광이 편리하다. 그러나 이곳을 '선택'하면 30달러의 옵션 비용을 추가 지불해야 한다/사진=이지혜 기자 팔달령 만리장성엔 케이블카(오른쪽)가 설치돼 있어 관광이 편리하다. 그러나 이곳을 '선택'하면 30달러의 옵션 비용을 추가 지불해야 한다/사진=이지혜 기자
여행 차량이 텐진-베이징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가이드는 또 다시 일정 변경 가능성을 안내했다. 가이드는 "여행사가 여러분에게 당초 제시한 코스는 동선이 중복되고 고객이 힘들어 해 더 편한 일정으로 조정이 필요하다"며 "만리장성도 케이블카가 없는 도보 관광은 너무 힘들 수 있다"고 운을 뗐다.

케이블카가 있는 만리장성 코스로 변경하려면 선택 관광 비용으로 1인당 30달러(한화 3만2000원)를 더 내야 했다. 가이드는 여기에 '작은 계림'으로 불리는 용경협 유람 관광과 평양냉면을 맛볼 수 있는 북한식당 식사에 각각 50달러와 40달러씩을 추가해야 한다고 했다. 일정에 포함돼 있는 금면왕조 공연도 원래 극장 C·D 구역 좌석이지만 객석이 무대와 너무 멀어 20달러를 추가로 내면 가까운 자리로 업그레이드해준다고 권고했다.


춮발 전 여행사로부터 참가토록 안내받은 선택관광 인력거투어 비용은 20달러다. '총액표시제'는 이를 금지했지만 여행사들은  여전히 실시하고 있다/사진=이지혜 기자 춮발 전 여행사로부터 참가토록 안내받은 선택관광 인력거투어 비용은 20달러다. '총액표시제'는 이를 금지했지만 여행사들은 여전히 실시하고 있다/사진=이지혜 기자
이런 선택 관광은 어린이 할인도 따로 없어 6명이 여행을 온 한 가족은 선택 관광에만 100만원이 넘는 돈을 더 내야 했다. 분당에서 온 이승재(가명·53세)씨는 "패키지 여행을 많이 와 봤지만 첫날부터 이렇게 옵션을 많이 이용하라고 할 줄은 몰랐다"며 "출발 전부터 선택 관광 금액과 종류를 정확하게 알려줬다면 예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노랑풍선의 이 여행상품은 애초부터 가격이 기형적인 구조였다. 노랑풍선 상품은 현지에서 추가로 지불해야 하는 선택 관광 비용을 140달러(15만원)로 잡았고, 여기에 가이드·기사 팁 45달러까지 더하면 총 195달러(21만원)가 된다.

베이징 여행시 서커스 관람 이외에 옵션으로 많이 참가하는 금면왕조쇼/사진=이지혜 기자 베이징 여행시 서커스 관람 이외에 옵션으로 많이 참가하는 금면왕조쇼/사진=이지혜 기자
결국 기자를 비롯한 26명의 여행객 대부분은 선택 관광을 모두 제값을 주고 진행해야 했다. 말이 선택이지 사실상 필수 관광인 셈이다. 일례로 용경협까지 버스로 2시간을 가야하는데 선택 관광 비용 50달러를 아끼려고 왕복 4시간을 버스 안에서 대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행객들은 이렇게 북한식당만 제외한 채 △만리장성 케이블카 30달러 △금면왕조 좌석 업그레이드 20달러 △인력거 투어 20달러 △가이드 팁 45달러 등으로 165달러를 현지에서 추가로 냈다.

비단 이 여행사 상품만 이런 것이 아니다. 같은 호텔을 이용한 한진관광 패키지여행 관광객들은 "소셜커머스에서 30만3000원에 여행 상품을 구매했는데 거의 매일 1~2개의 선택 관광을 강요당했다"고 말했다.
라텍스 가게의 쇼룸. 패키지여행객들은 전원 의무적으로 제품 설명회에 참여해야 한다/사진=이지혜 기자 라텍스 가게의 쇼룸. 패키지여행객들은 전원 의무적으로 제품 설명회에 참여해야 한다/사진=이지혜 기자
은근한 쇼핑 압박도 여행 일정의 효율성을 크게 떨어뜨렸다. 노랑풍선의 여행상품은 현지 쇼핑센터로 △라텍스 △진주 △동인당 △차 매장 등 4곳을 가도록 안내돼 있었다. 여행 3일째 대부분의 일정을 이들 쇼핑센터를 도는 것으로 진행했다. 가이드는 "여행비를 쇼핑센터에서 일부 지원받기 때문에 우리팀 전원이 입장해야 한다"며 "상품 설명을 듣는 동안 이탈을 자제해달라"고 말했다. 각 쇼핑 장소마다 1시간~1시간30분씩 억지로 시간을 떼워야 했다. 현지 판매원의 집요한 부탁에 못 이겨 진주목걸이나 라텍스 이불 등 수 십 만원짜리 물건을 구입하는 사례도 목격됐다.

대전에서 온 강은정(가명·40세)씨는 "저가 투어로 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선택 관광 비용을 각오했지만 금액이 너무 커 솔직히 당황했다"며 "총액표시제를 한다고 하지만 저가 투어의 폐해는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했다.

패키지여행에서 제공된 식사. 위 두 사진은 특식으로 소개된 샤브샤브(왼쪽)와 베이징 오리고기(오른쪽)/사진=이지혜 기자 패키지여행에서 제공된 식사. 위 두 사진은 특식으로 소개된 샤브샤브(왼쪽)와 베이징 오리고기(오른쪽)/사진=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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