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틀리 디자이너 이상엽의 조금 긴 디테일

머니투데이 김미한 기자 2014.09.23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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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한의 디테일]국내 대학 졸업 후 20년만에 한국 출신 디자이너 중 최고 위상

벤틀리에서 자동차 외관과 선행 연구를 총괄하는 이상엽 디자이너를 지난 18일 플라잉스퍼 V8 출시에 앞서 만났다.

이상엽 디자이너는 그는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한 뒤 미국 파사데나 아트센터칼리지를 거쳐 2009년까지 미국 GM에서 10여 년간 근무했다. 당시 영화 '트랜스포머'에서 '범블비'란 이름으로 유명한 쉐보레 카마로 등의 디자인을 이끌며 명성을 얻었다.

이후 폭스바겐그룹으로 이적해 폭스바겐과 아우디, 스코다, 포르쉐, 람보르기니 등 외관과 선행 디자인을 담당하기도 했다. 2013년부터 같은 그룹 내 벤틀리 모터스에서 활약중이다.



자동차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프로 디자이너들에게 이상엽의 자문자답을 꽉꽉 눌러 전한다. 특히 카 디자이너를 진로로 생각하고 있다면 스스로 묻고 생각해야 할, '디테일'들이다.

18일 벤틀리 플라잉스퍼 V8 한국 론칭 현장에서 발표 중인 이상엽./사진제공=벤틀리코리아18일 벤틀리 플라잉스퍼 V8 한국 론칭 현장에서 발표 중인 이상엽./사진제공=벤틀리코리아


-자동차 디자인을 하게 된 계기는?
▷ 나는 길을 가다 본 포르쉐의 조형미에 반해 자동차 디자인을 시작했다. 첫 차를 산 것도 클럽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생긴 자동차에 대한 흥미는 미대 조소과를 졸업한 후 자동차 분야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알아보게 만들었다. 유학을 가라는 뜻이 아니다. 미국 자동차를 원하면 미국 내 아무 곳이나 가서 살면 된다. 사람들이 무엇을 타고 왜 타는지 책으로는 배울 수 없다.



- 카 가이(Car Guy)가 아닌 것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 날 때부터 차고에 자기 차를 뜯고 고치며 커 온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이 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런데 잘 봐라. 미국 머슬카를 줄줄 외우는 사람이 유럽 클래식카 계보를 다 외우는 것이 아니다. 각자 잘 아는 부분이 있다. 그런 사람들 안에서 서로 잘 모르는 걸 배우게 된다면 그 자체로 즐기게 돼 있다.

- 지금 새로운 것에 대해 배고픈가?
▷ 처음 한국 밖에 나갔을 때 당황한 것은 내가 좋은 차에 대한 가치를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자동차 산업 환경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장점이기도 했다. 차에 대해 거의 백지 상태였기 때문에 특정 차에 대한 편견도 없고 흡수도 빨랐다. 그렇게 나의 손을 거쳐 발표된 차가, 가장 미국적인 차로 불리는 범블비, 쉐보레 카마로(2009)다. 당시 GM 디자이너로서 대우가 좋았다. 그런데 독일차가 계속 나를 자극했다. 그들은 같은 크기에도 실내를 잘 뽑는다. 골프는 작은 차지만, 운전석에 앉으면 머리 위가 훨씬 여유롭다. 이건 단순히 디자이너의 능력만으로 나오는 특징이 아니다.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10년 간 다닌 GM을 벗어나 폭스바겐 그룹으로 짐을 싼 이유다.

- 전공이나 출신 대학이 중요한가?
▷ 20년 전 미국 유학 시절 그곳 사람들은 한국에 무슨 디자인 대학이 있는지도 몰랐다. 수업 때마다 좋지 않은 디자인에 “한국차 같아!”는 표현을 종종 들었다. 지금은 각 국 OEM(주문자 생산) 회사에는 한국인이 대부분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인이 공식 론칭 무대에도 오른다. 결국 확실한 것은 실력으로 보여주면 된다.


확신하건대, 내가 경험한 외국 기업들은 배경을 보고 뽑지 않는다. 2차 대전을 경험한 유럽은 민족주의를 싫어하기에 인종은 더더욱 따지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쉽게 칭찬하지도 않는다. 도전해보고 싶다는 자세를 보고 사람을 뽑을 뿐이다. 팀 리더가 된 이후 사람을 뽑는 입장이 돼 보니 '이 사람이 5년 후, 10년 후 어떻게 성장하게 될까?'가 궁금한 사람이 우선이다. 이미 프로라면, 입시나 입사를 치른 후에도 여전히 그림을 잘 그리는지 생각해 보자. 실력이 없는 사람은 ‘입으로 디자인’을 한다.

- 메이커의 지향점은 무엇인가?
▷ 유명한 기업이 그 나라의 유명한 대학을 찾아 산학협동을 제안하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당장 결과물이 필요하다면 영국 RCA처럼 재학생의 반이 이미 프로 디자이너 경험이 있는 ‘마스터’급 학교과 산학 협력을 하면 된다.



뽑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학생과 학교의 커리큘럼에 따라 수준은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늘 새로운 인재를 찾아 가는 것은 현재 그 사람의 소속이 아니라, 앞으로 성장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한 발 늦더라도 실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찾아가고 만나보는 것은 메이커가 바라보는 지향점이 다른 것이다.

- 선 하나의 차이를 고민한 적 있나?
▷벤틀리의 디자인은 여백의 미다. 영어로는 ‘less is more’ 라고 번역해야겠다. 차에 장식선이 거의 없다. 앞쪽에서 보면 헤드라이트 아래로 가로 선이 하나 지나간다. 이 앞쪽 디자인을 구현하려면 한꺼번에 쇳물을 부어 떠내야 한다. 이 선을 다른 차들처럼 옆으로 지나가게만 해도 원가를 10분의 1로 줄일 수 있다. 쇠 버튼 하나도 플라스틱으로 바꾸면 몇 배나 싼 값에 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바꾸지 않는 것은 그 선들이 벤틀리 고유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라면 소위 '관리팀'이 이의를 걸지 않는다. 그래서 벤틀리는 새 모델이 나와도 이전 모델에 대해 구형이라는 말을 않는다. ‘B’ 엠블램 외에는 모델명도 차에 붙이지 않는다. 고유의 캐릭터가 있는 디자인은 항상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5년 후에도 촌스럽지 않은 클래식이 될 수 있다.
사진제공=벤틀리코리아사진제공=벤틀리코리아


- 럭셔리와 프리미엄을 구분하는가?
▷ 부자들이 왜 이 돈을 주고 벤틀리를 사는지, 어떤 열정으로 보는지를 생각해보라. 남들에게 보이기를 바라면서 사면 사치품이고 내게 보상하기 위해 사는 것이 럭셔리다. 무슨 사양이 비싸고 안 비싼지를 따지지 말고 하나의 캐릭터로 보면 된다. 벤틀리는 토크를 통한 럭셔리를 추구해 왔다. 토크가 느껴지는 사운드와 소재, 촉감을 차 하나에 총망라 한다. 럭셔리는 특별함을 주기 위해 고급을 쓰고 항상 어떤 부분이든 유일하다.

반면, 독일 3사는 프리미엄이다. 소재를 고급화해 대량생산한다. 차를 처음 타면 눈을 감고 냄새를 맡아 보라. 고급차를 구분하는 것은 '진실되다'는 것이다. 보통 차 안에서 가장 많이 보는 소재는 플라스틱이지만, 벤틀리에는 플라스틱이 없다. 나무과 가죽, 메탈뿐이다. 럭셔리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을 이해하는 고객은 비싸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 차를 볼 때 조직을 살핀 적 있나?
▷ 미국 메이커는 이른바 ‘파이낸스 리더’가 많다. 모든 결정은 프로그램 팀이 디자인까지 매뉴얼화해 효율적인 대량생산을 추구한다. 그 틈에서 모델마다 튀어야 하니, 디자인 역시 튀는 스타일링에 치중되기 마련이다.



유럽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특히 독일차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들의 엘리트 코스는 공학 전공자를 뽑아 키워보고 성적이 괜찮으면 회사가 나서 유명 대학의 공학박사로 만든다. 그 다음 마케팅과 디자인 등 각 분야 경력을 쌓게 하고 있다. 뭐든 일정한 시스템이 갖춰져 있고 리더 역시 엔지니어이기 때문에 ‘완벽’해야만 제품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를 보고 미국차는 스타일링이 좋다고 하고 독일차는 프로포션(비율)이 좋다는 말을 해왔던 것이다. 지난 경험에서 나라마다 내가 들은 칭찬의 말만 보아도 그들의 추구하는 방향을 알 수 있다. 미국은 “Hot!”이라고 하지만 독일은 “Much Better!”라 한다. 독일인에게는 디자인도 앞선 모델 보다 나아진 ‘개발’이기 때문이다.

- 요즘 차가 재미 없다고?
▷ 전통적인 디자인을 느끼게 하면서 현대성을 가미하기란 너무나 어렵다. 요즘 차가 다 비슷해 보이는 것은 각 대륙별 규제를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에어로 다이내믹 디자인은 공통의 과제라 뭐라 달리 구분하기 어렵다. 되려 벤틀리처럼 전통 있는 메이커는 보수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을 필요로 한다. 새 차가 나왔을 때 어떤 라인들을 고수하면서 어떤 부분들이 달라졌는지 살핀다면 굉장히 달리 보일 것이다. 예컨대 앞 범퍼 아래 흡기구 디자인을 눈여겨 보라.



- 디자인 외에 무엇을 알려고 하는가?
▷ CCO(크리에이티브 책임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늘었다. 디자이너가 디자인만 해서는 안 된다. 자동차의 향기, 배기음의 조화, 촉감까지 같이 염두에 두고 만들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벤틀리는 미국에선 60대 은퇴자가, 중국은 20대 중반 부호들이 가장 많이 산다. 그런데 차는 한 종류다. 모두를 만족시켜야 하는 일은 단순한 조사만으로는 힘들다. 그런 일을 선행 디자인이라 통칭하고 디자이너로서 겸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변화하고 있는 요즘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과 기술적인 이해가 없이는 일 할 수 없다. 같은 도료를 입혀도 알루미늄이 몸통이면 그 느낌이 차가워진다. 플라스틱으로 따뜻해 보이지만 빛을 받으면 강철과 달리 표면의 굴곡이 생겨 덜 고급스럽다. 그런 이유로 럭셔리 카는 다루기 어려운 소재를 계속 쓰는 것이다.

- 좋은 디자이너와 좋은 리더의 차이가 궁금한가?
▷ 좋은 디자이너는 분명히 재능이 필요하다. 하지만 리더의 잘못된 선택이 '바보 스타'를 만든다. 리더가 일하는 리듬을 보면서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라고 느끼면 드림팀이 된다. 예를 들어 스타일링이 강한 디자이너는 규제에 맞춘 범퍼의 디자인에 서툴 수 있다. 그런 각 자의 강약을 빨리 파악하고 일을 맞춰 주는 것이 중요하다. 나를 가르친 5명의 스승들이 바로 그랬다. 좋은 디자이너와 좋은 리더는 전혀 다르다.



- 새로운 곳을 찾을 때 '텃새' 걱정을 하는가?
▷ 나는 2개 기업, 7개 나라를 거쳐 영국 벤틀리에 와 있다. 2년 전, 미국식 엑센트를 쓰는 동양인이 독일을 거쳐 영국을 왔을 때, 나와 함께 일해야 하는 40~50명의 동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물론 디자인으로 보여주면 될 일이지만 우선 내가 먼저 한 일은 150년 된 영국 전통 주택으로 이사한 것이다. 옷도 바꿨다. 독일 메이커 질 샌더를 입다가 영국 메이커, 폴 스미스를 입었다. 겉으로 점잖지만 안감이 알록달록한, 반전이 있는 영국적인 매력을 찾았다. 이렇게 영국적인 것을 이해하기 위한 나의 노력을 그저 보여주었다. 그 뒤로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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