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雜s]장사꾼 정몽구의 '10조 노망(老望)'

머니투데이 김준형 정치부장 겸 경제부장 2014.09.19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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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편집자주|40대 남자가 늘어놓는 잡스런 이야기, 이 나이에도 여전히 나도 잡스가 될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못하는 40대의 다이어리입니다. 몇년 있으면 50雜s로 바뀝니다. 계속 쓸 수 있다면...

현대차, 정확히는 정몽구 회장이 한전부지 매입에 10조 5500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쐈다.

10조원이라면, 보통사람은 도대체 가늠이 안 가는 돈이다. 감정가의 3배가 넘는 돈이니, 당연히 '승자의 저주' 이야기가 뒤따를 수 밖에 없다.

이 돈 내고 한전 땅 사서 그만큼 이익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당장 주가가 9%나 떨어졌다. 현대차 같은 대형주 주가로는 금융위기에 버금가는 때나 있었던 급락이다. 현대차 주주들로서는 화가 날 만도 한다. 김기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황제경영의 폐해를 보여주는 일"이라고 쏘아붙였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4일간의 미국현장경영을 마치고 8일 오후 서울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4일간의 미국현장경영을 마치고 8일 오후 서울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낙찰 발표 직후부터 '10조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글들이 돌아다닌다.

이 돈이면…



입찰에서 맞붙었던 삼성 이건희 회장의 보유주식(10조6000억원)을 다 살 수 있다.
쪼개졌던 현대그룹이나, SK하이닉스도 다시 사들여 '범 현대'를 재건할수 있다.

좀 더 실감나는 실생활 버전으로는,
(담뱃값이 오른다고 하는데) 42억갑을 사재기할 수 있다.
(요즘 아파트 난방비를 둘러싼 한 여배우의 투쟁이 온라인을 달구고 있지만)
1년6개월간 전 국민에게 가정용 석유 가스를 공급할 수 있다고도 한다.
먹을 것으로 치면 두 달간 전 국민이 짜장면을 먹는다는 계산도 있고,
1200원짜리 소주는 88억병,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는 25억잔을 마실 수 있다.
아예 현금으로 나눠주면 국민들에게 1인당 21만원이 돌아간다.

이런 돈을…


유머의 뒤 끝에는 "정몽구 회장이 노망(老妄) 난 거 아니냐"는 말이 따라 붙는다.
경영권 승계가 급속히 이뤄질 거라는 기대에 후계구도의 중심에 서 있는 현대글로비스의 주가가 강세를 보인다는 분석(?)도 떠돈다.

돈 10억원을 써도 누구한테, 어디에 썼는지 뭐했는지 말이 많을 터인데, 10조원을 쏜다는데 이런 뒷말과 비판을 각오하지 않았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산수(傘壽)'라고 대접해 부르는 80을 바라보는 나이에 '먼 미래'를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겨우 50을 바라보는 내 나이에도 일을 벌이기보다는, 알량한 자산이나마 지키려는 마음이 드는 걸 보면 그렇다.
정몽구 회장이 100년을 내다본다며, 몇년이 걸릴 지도 모르는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GBC)를 짓고 이른바 한국판 '아우토슈타트'를 만들겠다고 나선 게 그래서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야기가 좀 돌아가지만)
어제 정부가 발표한 예산안은 사상 최대 적자재정을 예고했다.
부족한 돈은 적자국채와 더불어 담뱃세, 주민세, 자동차세 처럼 일반 국민들의 호주머니에서 털어내서 막는다. 그래 봤자 한전 땅값 절반인 5조원이 내년에 더 걷힌다.
여전히 OECD최저 수준인 실효세율, 지난 정부때 깎아줬던 법인세 인하는 '이념적 성역'으로 두고 '우회증세, 꼼수증세, 사실상 증세' 기술을 구사하는 정부가 딱하기만 하다. 서민들의 푼돈 몇천원씩을 걷어가는 '거위털 뽑기'에 대한 납세자들의 분노도 심상치 않다.

정부가 기껏 기업들의 주머니를 열어보자며 내세운 고육책이 사내유보과세, 즉 (좀 부드럽게 표현한)기업소득환류세제이다. 그래봤자 기대되는 세수 증대분은 몇 천억원이나 될 지 말지 모른다. 최경환 부총리 아예 "기대 세수는 '제로'"라고 선언했다. 기업들이 '투자'를 통해 돈을 토해 내면 세금을 더 걷지 않을 것이라는 압박이자 호소인 셈이다.

정회장의 10조원 입찰은 본질적으로 이런 현재의 정치적 수요와, 미래의 투자를 결합시킨 '큰 장사꾼'의 베팅이다.

너무 많이 쓰는거 아니냐는 질문에 정회장은 "그 돈을 개인이 챙겨가는게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많이 썼다면 좋은 일 한 거라고 치자"고도 했다는 전언이다.
5공청문회에 나와서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안주냐"고 털어놓았던 부친 정주영 회장에 비하면 한단계 진화된, 세련된 '장삿꾼 정신'을 정부와 국민에게 공개적으로 내놓은 것이다.

가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장의 과실이 집중되고 정부의 혜택을 받아왔던 기업들이 내수부양과 성장동력 확충에 기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를 통해 경제가 회복되면 결국 내수가 늘어나고 기업으로 돌아가는 선순환 구조가 갖춰진다는 건, '최(경환)노믹스' 가 진보진영과 공유하는 사회적 공론이다.

현대차가 내놓은 돈은 한전의 부채상환으로 들어가 세금을 줄여준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진보적' 관점에서는 주주자본주의의 잣대를 들이대 '독단 경영'을 비판하는건 자기 모순이다.

따지고 보면 내가 낼 돈을 남에게 내도록 하는 게 세금을 둘러싼 논란의 본질이다.
현대차의 '주주'들은 일반 '국민'들이 뽑히는 거위털을 조금이나마 줄여주고, 한전 주주들의 배당을 늘려주는 셈이다.(현대차가 10조원 부담을 차 값을 올려서 벌충할 지, 소비자들이 그런 의심으로 현대차를 사지 않을지는 시장에서 판단할 일이다).

페이스북은 모바일 메시징 서비스 왓츠앱을 190억달러(19조원)에 인수했다.
모바일 메신저 스냅챗도 3조 정도에 사겠다고 제안했다. 중국의 알리바바는 스내챗을 10조원에 사겠다고 나섰다. 성장성 있는 회사를 사는 것과 땅을 사는게 같을 수 있냐고 할 수도 있다. (현대차는 부동산보다는 미래가치를 봤다고 하지만)적어도 확실히 공급이 제한적인 재화, 서울시내 마지막 노른자위 땅에 투자하는 게 생긴지 얼마 안되는 인터넷 기업을 10조원에 사들이는 것보다는 덜 위험해 보인다.

정회장은 "지금 놓치면 기회가 없다"고 했다.
주식투자 해본 사람은 알지만 사야겠다고 생각하면 상한가를 써서라도 사는게 맞다. '몇 틱' 따져보면서 주문 클릭을 망설이다가 가격이 올라가면, 그 다음엔 그 가격이 생각나서 더 못산다(팔때도 몇푼 더 받으려고 하지 말고 하한가로 던지는게 맞다.)

삼성은 5조원 정도를 생각했다고 하는데, 미래의 기대 수익률이 100%를 넘는다면 그 두배인 10조원 지르는게 이상해보이지도 않는다.

훗날 제대로 '잭 팟'을 터뜨려 주주들에게도 옳은 판단이었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은 이제부터 그룹 전체의 숙제다. 정몽구 회장이 그 잭팟을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의 노망(老望)이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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