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경제관료들, 나를 제거하려는 프로그램 있었다"

머니투데이 양영권 기자 2014.08.21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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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입수]'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발간… "마지막 일, 세계 돌아다닐 경제지도자 만드는 것"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해 3월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부암동 AW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대우그룹 창립45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기념공연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뉴스1<br>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해 3월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부암동 AW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대우그룹 창립45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기념공연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뉴스1


"나는 경제 관료들이 나를 제거하려는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다고 믿고 있어요.(…)유동성 규제를 할 때에만 대우만 겨냥한 조치를 내놓고, DJ(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우리 부채 상황 보고할 때에도 '밀어내기 수출'이다, '외상수출'이다, 하며 수출금융 해주지 않은 잘못을 우리에게 뒤집어 씌웠지요. 나중에 삼성과 '빅딜'을 할 때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딜이 깨지도록 방해했다는 증거가 있어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78)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대우그룹'이 한국 최대의 부실기업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해체된 지 15년만이다. 그는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가 집필한 대화록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통해 대우그룹의 성장과 해체에 대해 입장을 밝혔다.



책 제목은 1989년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된 김 전 회장의 저서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에서 따왔다. 머니투데이는 책이 공식 발간되기 전 이를 입수해 주요 내용을 공개한다.

◇ IMF 원인 - 처방 놓고 관료와 격돌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해체는 국민의 정부 신흥 관료와의 대립이 배경이었음을 분명히 했다.

DJ 집권 초기 그는 DJ의 경제 가정교사라 불리는 위치였다. DJ는 인수위시절 김 전 회장에게 "나는 정치는 잘 알지만 경제는 잘 모르니 김 회장이 경제는 해달라"고 할 정도였다.

DJ와의 인연은 대통령이 되기 전 미국을 방문했을 때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을 소개해달라고 해서 만나게 해줬던 게 계기였다. 키신저는 당시 대우그룹의 자문그룹에 속한 인사였다.


전경련 회장이기도 했던 김 전 회장은 정부의 각종 경제회의에 참석해 관료들과 사사건건 격돌했다.

먼저 IMF 사태의 원인부터 IMF(국제통화기금)와 한국 정부는 기업부문이 금융위기에 책임이 있다며 대기업들의 부채 비율이 높은 것을 문제 삼았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은 "정부에서 환율 관리를 잘못 해놓고 그것을 기업 부실이라고 몰아붙인 것도 크다"고 말한다. 김 전 회장은 "1달러당 800원에서 1600원으로 환율이 변하면서 외화 부채가 2배 증가했다"며 "이는 정부가 환율 관리를 잘못해서 기업이 피해를 당한 것이지 기업이 외환위기를 일으킨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IMF 해법을 놓고도 충돌했다. 관료들은 IMF식 '구조조정'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은 수출을 늘려 IMF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힐튼호텔에서 당시 김 대통령과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을 만난 자리에서 "금년도 수출을 조금만 더 하면 500억불 흑자 난다. 그것으로 IMF에서 빌린 돈 다 갚고도 남고, 내년에 500억불 흑자 나면 외환보유액이 된다"고 했다. 실제로 1998년 무역수지는 416억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관료들, 나를 제거하려는 프로그램 있었다"

경제팀과의 관계 악화는 그와 대우그룹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그는 "그 쪽(관료들)은 (내가 DJ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자신들의 의견을 불신하게 만든다는) 확증을 잡았으니까…우리를 어떻게든 제거하는 것이 목표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대우그룹에 대한 돈줄 죄기가 시작됐다. 정부는 1998년 7월 그룹별 기업어음(CP) 한도액을 설정하고 같은 해 10월에는 회사채 발행한도 제한 조치를 발표한다. CP와 회사채 모두 한도 초과 상태인 대우그룹은 유동성 문제에 갇히게 된다.

대우의 유동성 위기에 대해 김 회장은 본말이 전도됐다고 말한다. 수출금융이 막혀서 16조 원이 갑자기 필요해졌고, 금융권이 BIS비율 맞추기 등 자신들의 구조조정을 하면서 3조 원의 대출을 회수해 갔다는 것이다. 대우의 잘잘못 여부와 관계없이 외부 여건 때문에 할 수 없이 19조 원을 조달해야 했는데 이것이 왜 ‘기업부실’의 증거냐고 반문한다.

“그 당시 우리가 수출금융을 풀어달라고 요청하던 것에 대해 정부나 언론에서는 대우가 무슨 큰 특혜를 요구하는 듯이 얘기했는데, 그게 절대 아닙니다. 기업은 정부나 금융기관에서 만들어놓은 시스템에 따라서 활동을 합니다. 그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 왜 기업 잘못인가요? 시스템이 고장난 걸 고쳐달라는 것이 왜 특혜를 요구하는 겁니까?”

이즈음 GM과의 합작이 추진되지만, '딜'이 늦어진 끝에 '거의 공짜로' 대우차를 GM에 넘겨주게 된다. 이에 대해서도 김 전 회장은 "우리 대우를 좋지 않게 보던 정부 관계자들이 GM 사람들에게 안 좋은 얘기를 해서 협상을 방해했을 수도 있겠다"며 "나는 경제관료들이 나를 제거하려는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과의 '자동차 빅딜'은 대우그룹이 정부의 지원을 끌어내면서 유동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

자동차 빅딜은 이학수 전 삼성그룹 부회장(당시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이 "김우중의 아이디어"라고 밝히고,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삼성의 아이디어"라고 밝히는 등 아직 관련자들의 말이 엇갈리는 사안이다. 이에 대해 김 전 회장은 "정부에서 강하게 권해 (빅딜에) 응한 것"이라고 밝혔다.

'자동차 빅딜'은 김 전 회장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까지 합의한 사안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무산됐다. 이에 대해 김 전 회장은 "정부가 관여하지 않았으면 빅딜이 순조로웠을 것"이라며 "정부가 덤벼서 스케줄을 만들고, 방해해서 안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만약 빅딜이 됐다면 (경제팀이)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가운데)이 2005년 오랜 해외 체류를 마치고 재판을 받기 위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고개를 숙인 채 입국하는 모습. /사진= 머니투데이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가운데)이 2005년 오랜 해외 체류를 마치고 재판을 받기 위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고개를 숙인 채 입국하는 모습. /사진= 머니투데이
그는 "정부가 대우자동차를 잘못 처리해서 한국경제가 손해 본 금액만 210억 달러(약 30조 원)가 넘는다"며 "한국이 금융위기 때 IMF로부터 빌린 돈 만큼이나 많은 금액"이라고 밝혔다.

이어 "대우자동차를 실패한 투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대우 해체에 따르는 비용은 한국경제가 고스란히 부담했고 투자 성과는 GM이 다 가져갔다"며 "대우 해체는 실패한 정책이고 GM의 성공은 숨기고 싶은 진실"이라고 밝혔다.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는 이 전 부총리와 강 전 수석 등 DJ정부 경제팀 인사들을 실명 비판했다.

◇ 김일성 김정일 20번 만난 김우중 '민족주의자' 면모

책에서 김 전 회장과 관련한 남북관계 비화도 처음으로 공개됐다. 김 전 회장이 △노태우 대통령 때부터 ‘대북특사’로 일하면서 남북기본합의서(1991년)를 만들어내고 노태우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간 정상회담을 거의 성사시켜 놓았던 것이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중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 합의(1994년)’에 김 전 회장이 막후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 등이다.

김 전 회장은 북한을 오가면서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20번 이상 만났다. 그동안 일반적으로는 신흥시장 개척에 앞서 나간 김 회장이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시장’을 열기 위해 북한에 드나들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의 진짜 관심은 남북관계 개선 자체에 있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독립운동, 일제시대도 거치면서 그렇게 고생해가며 나라를 일궜는데, 남북을 위해서 되면 좋고, 안 되면 최선을 다했다는 흔적이라도 역사에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 하면서 남북화해를 권유했어요. 김 주석도 지도자로서 (역사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어요. 내 얘기에 동의했지요. 김 주석은 (남북관계를) 어떻게든 잘하려고 했어요.” 김 전 회장이 김일성을 만나 했던 얘기에 대한 소회다.

◇ 사회 갈등 해소 '파이 키우기'에서 찾아야

베트남 하노이사범대학에서 글로벌 청년사업가(GYBM) 프로그램 연수생들이 특강을 듣는 모습. /사진제공=GYMB베트남 하노이사범대학에서 글로벌 청년사업가(GYBM) 프로그램 연수생들이 특강을 듣는 모습. /사진제공=GYMB
김 전 회장은 하노이에 머물면서 2012년부터 글로벌 YBM(GYBM, Global Young Business Managers) 과정을 만들어 젊은이들을 글로벌 기업인으로 양성하는 사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베트남 같은 개발도상국은 일자리가 많이 만들어진다”며 “기대수준만 조금 낮추면 일할 수 있는 것들이 많고 앞으로 (잘될 수 있는) 가능성도 더 높다”고 말한다.

사회에 대해서도 조언한다. "한국사회가 지금 너무 많은 갈등에 빠져 있는 것 같아요. 갈등은 당사자들이 상생할 수 있도록 전체 파이를 키우면서 해결하는 게 제일 좋아요. 대기업-중소기업 갈등도 결국 대기업이 중소기업 물건을 많이 사주고 해외 시장 개척하는 것을 도와주면서 같이 커가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요."

"우리가 하는 건 세계를 돌아다닐 경제지도자를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이걸 내가 마지막 흔적을 남기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한때 '세계 경영'으로 신흥국 출신 최대 규모의 다국적 기업을 일궜던 노 경영인의 마지막 메시지다.
김우중 "경제관료들, 나를 제거하려는 프로그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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