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포위' 고아라는 실존인물? 여성 강력형사의 삶

머니투데이 이원광 기자 2014.07.27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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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사람들]서울 강남경찰서 강력2팀 김은지 경장

서울 강남경찰서 강력2팀 김은지 경장/ 사진=머니투데이 이기범 기자서울 강남경찰서 강력2팀 김은지 경장/ 사진=머니투데이 이기범 기자


# 지난 3월 서울 송파구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 수개월 추적 끝에 장모씨(35)의 대포차를 발견한 순간 강력2팀엔 정적이 흘렀다. 강남 일대 고급 주택가에서 일명 '빠루'(노루발못뽑이)를 이용, 총 26차례에 수억대의 금품을 훔친 장씨의 은닉처를 발견한 것.

섣불리 접근할 순 없었다. 장씨가 발코니에서 뛰어내리거나 자해할 우려 때문. 이때 강력계 여형사가 기지를 발휘했다. "경비아저씨, 저 학습지 강사인데요. 차를 긁어서요. 차 주인 좀 내려오라고 하면 안될까요." 주차장으로 내려온 장씨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도주하려는 순간. 이미 양손에는 수갑이 채워진 후였다.



드라마 속 이야기가 아니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사건 현장만을 고집하는 경남 남해 출신 강력계 여형사이자, 최근 종영한 '너는 포위됐다'의 고아라의 실제 인물. 서울 강남경찰서 강력2팀 김은지 경장(33·여)의 일상이다.

"전과가 많은 범죄자들은 촉이 있어요. 덩치 좋은 강력계 남자 형사가 접근하면 금방 눈치 채고 달아나죠. 그런데 강력계에 여형사가 있을 거라고 생각 못합니다. 방심하는 거죠. 그 순간 어깨에 손을 올리고 얘기하는 겁니다. 가자고."



김 경장은 강력 사건 현장에서 여경들의 역할이 크다고 했다. 장기간의 잠복과 탐문을 통해 범인을 추적하는 만큼 사고 없이 검거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 검거 과정에서 '범인이 다쳐도 경찰 탓, 경찰이 다쳐도 경찰 탓'이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추적했던 범인을 만났을 때, 자칫 흥분해서 '누구야' 소리치면 무조건 도망가요. 쫓아가더라도 100% 격투로 이어지고요. 이럴 때 조용히 뒤에 가서 '니가 어떻게 해봤자 소용없으니 좋게 가자'고 나지막이 말해요. 범인을 제압하면서도 심리적으로 가라앉힐 시간을 주는 거예요."

범인 눈을 피하기 위해 위장하는 일은 일상이 됐다. 학습지 강사 뿐 아니라, 조직폭력배 행사장에서 동료 형사와 연인 행세를 하기도 한다. 김 경장은 "남자 형사 혼자 가면 '저 사람 누구지' 식으로 주목을 받는다. 제가 옆에 있으면 '애인이구나' 하고 넘어가죠"라고 말했다.


서울 강남경찰서 강력2팀 김은지 경장/ 사진=머니투데이 이기범 기자서울 강남경찰서 강력2팀 김은지 경장/ 사진=머니투데이 이기범 기자
김 경장이 강력계 형사가 되는 길은 평탄치만은 않았다. 국문학도 김 경장은 신춘문예를 준비하던 대학교 3학년, 미용실에서 우연히 미국 유명 프로파일러가 쓴 책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를 읽고 연쇄범죄를 추적하는 프로파일러가 되기로 결심했다. 2008년 5월 6번 낙방 끝에 경찰이 되기까지 2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김 경장은 경찰이 되고도 강력계에 입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경남 남해경찰서 중앙지구대에 배치된 후 남해서 강력계 형사들을 쫓아다녔다. 5년 후엔 무작정 상경해 박미옥 강남서 강력계장을 찾아갔다. 그리곤 4시간 동안 강력계 형사로 받아달라고 '호소'했다.

2013년 5월 강력계 형사가 된 후 동료들의 선입견을 극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사건 현장에서 빠지고 사무실에서 통신 분석을 하기 일쑤였다. 몇몇 남자 형사들은 김 경장이 강력팀에서 얼마나 버틸지를 두고 내기를 했다. 그러나 김 경장은 이런 현실을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겼다.

"처음엔 머리를 숏커트로 잘랐어요. 화장도 일체 안 하고요. 못 하겠다, 안 하겠다 한번 안 했어요. 시키지 않아도 현장에 무조건 따라갔어요. 술도 많이 먹고요. 여경이라는 게 눈에 띄지 않도록 말이죠."

차츰 팀원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김 경장은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한 선배가 '이젠 형님이라고 불러'라고 했을 때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인정해주는 거잖아요. 이젠 다른 팀 선배에게 형님이라고 하면 '아무한테나 형님이라고 하지 말라'면서 예뻐해주세요"라며 미소지었다.

어엿한 강력계 형사가 된 김 경장은 강력계 형사의 보람은 '현장'에 있다고 말했다. 김 경장은 "범인들이 자기 의사나 동기를 맘껏 펼쳐 놓은 현장에서 '이 사람이 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런 행동을 했을까' 생각하잖아요. 경찰이니까 할 수 있는 것인데 기왕 경찰이 됐으면 강력계 형사가 되서 이런 점을 즐기고 누려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라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현장을 직접 보고 체험하는 것이죠"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 경장은 강력계 형사를 꿈꾸는 후배들에게도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인정해요. 여경이 남경보다 지구력이나 체력, 근력은 떨어질 겁니다. 대신 여경들이 남경보다 꼼꼼하고 섬세한 면이 있어요. 사고 없이 검거하거나 동선 추적, 통신 분석 등에서도 유리합니다. 무작정 '똑같이 대해달라' 보다 나만의 강점을 살리면 강력계 형사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남자들이 여경을 싫어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익숙치 않아서 그럴 뿐이에요. 형사엔 남경, 여경은 없습니다. 형사일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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