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선의 유럽여행기]“고객은 왕이 아니다?”

머니투데이 김홍선 2014.03.12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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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이탈리아 장인정신 속에 숨어 있는 주인의식

편집자주 필자는 23년간 IT 분야에서 엔지니어로, 벤처 기업가로, 전문경영인으로서 종사한 IT 전문가다. '누가 미래를 가질 것인가?'라는 저서도 출간했다. 그는 최근 7년간 몸 담았던 안랩의 CEO를 그만 두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인생의 2막을 준비하면서 그는 최근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여행이야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고, 또 전문가들의 여행기도 많다. IT 경영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여행의 단상은 어떨까. 바쁜 일상으로 출장 외에 여유있는 여행을 꿈꿀 수 없는 CEO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쯤으로 시리즈를 연재한다. 여행경로는 로마에서 시작해 나폴리-피렌체-베니스-밀라노-파리까지. 20일간의 여정이다.

섬의 도시 베네치아에는 자신들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섬들이 있다. 무라노, 부라노가 대표적인 예다. 무라노 섬은 유리 공예품의 상징이다. 무라노 산(産) 이라고 브랜드화가 되어 있을 정도다. 반면 부라노 섬은 손으로 직접 만든 고급 레이스 수예품으로 유명하다.

무라노의 유리 공방 /사진=김홍선무라노의 유리 공방 /사진=김홍선


반나절 일정으로 이 두 섬을 향해 출발했다. 여러 섬을 거쳐 가기 때문에, 혹시 놓칠까 봐 신경을 곤두세웠다. 마침 배 안에서 마주 앉은 중년 여성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아주 커다란 카메라 하나 들고 있는 것으로 봐서 여행객으로 보이는데도 이곳에 아주 익숙한 듯 여유가 있다.



“혹시 부라노에 가십니까?”

고개를 끄덕인다. 이 분과 같이 내리면 되겠다 싶어, 그제야 마음 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호주에서 휴가차 왔는데, 이탈리아에서만 3개월 보낸다고 한다. 어디가 제일 좋으냐고 묻자, 단연코 베네치아를 꼽는다. 휴가 대부분을 이 작은 도시에서 지낸다니, 한편 부럽기도 하면서도 과연 그게 좋을지 약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직 그런 스타일의 휴가 문화가 낯설어서다.



드디어, 부라노 섬에 내렸다. 이 섬은 알록달록한 색깔의 집들로 유명하다. 안개가 자옥해도 섬을 찾아오라고 만든 전통이 이제는 섬의 얼굴이 되었다. 특산품을 구경하려고 가게를 기웃거리는데, 한 상점의 깔끔한 진열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쉽게도 문을 닫았는데, 다음과 같은 메모가 입구에 걸려있다.

“이곳에 왔는데, 제가 없다면 우리는 만날 수 없습니다. 제가 오면 있는 것이고, 가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것도 운명입니다.”

자신을 만나는 것도 운명이라니, 도대체 물건을 파는 가게에서 할 말인가? 일종의 조크가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기분 내킬 때 판다.”와 같은 묘한 고집이 느껴졌다. 과연 우리나라에도 이런 메모를 걸어 둘 상점이 있을까? 그런데 문득 이탈리아 여행 내내 고객보다는 상점 주인이 우위에 있는 것과 같았던 느낌이 떠올랐다.


이탈리아의 장인 정신

“고객은 왕이다.”라는 문구는 보편적인 비즈니스의 명제다. 고객 없이는 비즈니스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왜 그런지 이탈리아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친절함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혹 자기가 만든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자부심인가? 이탈리아 특유의 장인 정신 때문인가?

레이스 박물관 (부라노) /사진=김홍선레이스 박물관 (부라노) /사진=김홍선
부라노 섬의 레이스 박물관에는 어떻게 기술을 교육받고, 전승해 왔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어느 상점에 들어갔더니, 대를 이어 내려온 작품까지 별도의 방에 전시되어 있다. 이 정도면 단순히 먹고 살려는 방편이 아니다. 소위 혼이 들어간 예술의 경지다. 아주 아름답다.

무라노 섬은 유리 장인들의 공동체다. 유럽 왕실에 고급 유리 제품을 공급하는 것은 베네치아의 역할이었다. 신기술을 보호하고 화재 위험을 피하고자, 유리 기술자들을 이 외딴곳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지금도 도제식으로 대를 이어 계승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러한 장인 정신이 이탈리아 곳곳에서 발견된다. 호화 명품, 카니발용 가면, 고풍스러운 펜과 종이 등. 특유의 커피 문화와 젤라토 가게, 심지어는 동네 음식점에서도 개성과 전통이 어우러진 모습을 발견한다. 자신의 상점 이름을 내건 파스타나 피자는 그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요리법이다. 그런 자부심이 “내가 팔고 싶을 때 판다”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

진정으로 고객을 위하려면

사실 ‘고객은 왕이다’가 항상 맞는지도 생각을 바꾸어 볼 필요가 있다. 비즈니스는 거래다. 내가 가치를 창출해 내고, 그것을 원하는 사람이 돈이나 다른 대용물과 교환하는 거래다. 고객이 사용하면서 제품과 기술은 진화하고 발전한다. 또한, 고객의 요구 사항을 잘 분석하면 시장의 기회가 정량화되고 체계화된다.

그러나, 만일 고객이 비합리적이고, 비표준 적이라도 그래야 하는가? 자신의 위치를 남용하는 고객도 있다. 그 제품의 가치를 알고 즐거워하기보다는, “내가 얼마나 사 주는 고객인데”라는 금권만능적 사고 방식을 가진 고객도 적지 않다. 제품도 본래의 목표와 정신이 있다. 그것을 사업화하는 과정에서 고객의 이기적 요구가 방향 자체를 흔들어 놓으면, 본래의 설계 의도는 깨진다.

반면에 고집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설계 사상을 밀어 부친 애플의 스티브 잡스, 어떻게 돈을 벌지도 안 정하고 일단 최고의 검색 엔진을 만들었던 구글의 창업자, 스스로를 변화 중독자라며 혁신에 몰입한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자신의 꿈과 열정에 몰입했던 성공적인 사업가들 아닌가? 그들은 고객을 무시한 게 아니라, 고객이 좋아할 미래를 찾았다. 그것이 진정한 왕 대접이다. 그 기반에는 자신의 기술, 자신의 아이디어, 자신의 꿈이라는 주인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상점 이름을 딴 고유의 파스타 /사진=김홍선상점 이름을 딴 고유의 파스타 /사진=김홍선
이탈리아에서 식당에 들어가면 종업원이 안내하기 전까지 절대로 자리에 앉으면 안 된다고 주의를 받았다. 한국 여행객들이 빈자리가 보이면 그냥 앉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안내자로서는 당혹스럽다고 한다. 그런 예절은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유독 식당 주인의 주인 의식이 강하다고 한다. “내 집에 왔으면 주인 말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있다는 것이다. 고객이 우선인 우리 문화와는 차이가 느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것에 대한 자부심과 주인의식을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본다. 고객 이전에 자신의 것이 먼저다. 오너쉽을 가지고 창조적 열정을 쏟아 붇고 있는 이탈리아의 장인 정신에서 엿본 짧은 생각이다. 결국, 고객 중심이란 고객에게 진정한 가치를 제공하기 위한 장인적인 노력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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