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 반주가 같은 틀 안에서 조금씩 변형되며 곡 내내 반복되고 오른손 연주가 자유롭게 펼쳐지는 등, 곡의 구조가 녹턴nocturne의 전형이다. 이 곡은 녹턴 형식의 창시자인 아일랜드 출신의 피아니스트 존 필드John Field (1782-1837) 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곡이라는 평을 받는다. 쇼팽이 1830년대 초반 파리에서 활동할 때 사람들은 쇼팽이 존 필드의 제자일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두 사람의 음악은 유사한 면이 많다.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위치한 존 필드 부조상
그로부터 10년 후 1791년 모짜르트는 비엔나에서 초연한 그의 서곡 에서 클레멘티의 소나타 Bb major Op. 24, No.2 의 도입 부분을 사용하여 클레멘티에 대한 경의의 마음을 표한다.
다시 존 필드로 돌아오자. 1799년 런던에서 17세 천재 소년 존 필드는 그의 첫 번째 피아노 협주곡 초연을 갖는다. 그의 연주실력은 하디든Haydn 의 극찬을 받을 정도로 완벽하였다. 1802년 존 필드는 파리와 비엔나를 거쳐 클레멘티와 함께 러시아의 생 뻬테르부르크에서 공연을 했는데 생 뻬테르부르크에 매료된 존 필드는 돌아가지 않고 1805년 모스크바에 정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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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은 당시 생 뻬테르부르크가 유럽 중심 도시의 한 곳으로서 예술의 장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스승과 오랜 공연을 해온 전도유망한 천재가 비엔나나 파리가 아닌 동토의 땅에 홀로 남겠다며 스승과 결별한 배경은 무엇일까? 상술에 밝은 클레멘티가 제자마저도 그의 상술에 이용하는 것에 신물이 나서 내린 결단이 아니었을까 싶다. 클레멘티는 생 뻬테르부르크에 자신의 피아노 쇼룸을 만들어 놓고 존 필드를 피아노 판매원으로 부려먹기까지 했던 것이다.
러시아에 정착한 존 필드는 1810년 프랑스 배우 아델레이드 페르체로Adelaide Percherou 와 결혼, 모스크바와 생 뻬테르부르크를 오가며 29년간 활동하며 명성을 더해간다. 그러나 성공의 정점에 선 그는 자기관리에 실패한다. 나태하고 괴팍한 보헤미안의 생활을 하며 술독에 빠지게 되고 결국 사람들로부터 “술 취한 존” 이라는 손가락질을 받는 수모를 겪는다. 그와 함께 공연을 하기도 했던 부인 아델레이드는 결혼한지 5년 후 아들 에이드리언을 낳자마자 존 필드의 곁을 떠나버린다.
암에 걸린 존 필드는 1831년 치료를 위해 파리로 돌아온 후, 유럽 순회에 나서는데 병세가 악화되어 1834년 나폴리의 한 병원에서 여러 차례 수술을 받으면서 수개월 동안 입원하게 된다. 러시아의 귀족 라흐마노프Rakhmanovs 가족이 병상의 그를 발견하고 1835년 모스크바로 데리고 돌아왔으나 존 필드는 그로부터 16개월 후 모스크바에서 쓸쓸히 고독했던 생애를 마감한다.
존 필드의 녹턴 18곡은 모두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로 가득하다. 그 가운데서도 필자는 특히 2번 C단조 녹턴을 좋아하는데, 슬라브 풍의 색깔이 다소 묻어있는 것만 빼면 과연 쇼팽의 곡이라고 하여도 모를 정도로 그 멜란콜리한 서정성이 그야말로 쇼팽스럽다.
이쯤 되면 녹턴의 오리지널이 뒤바뀐 듯하여 존 필드의 쓸쓸한 말년과 함께 인생이란 참 얄궂다는 생각이 든다. 천재로 태어나 세상의 정상에 올랐다가 바닥까지 내려와 자신의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 를 남에게 내어주고 역사 속으로 쓸쓸히 사라진 존 필드, 그가 러시아에 정착하지 않고 파리나 런던으로 돌아왔다면, 아니 러시아에서 술독에 빠지지 않았다면, 평탄한 결혼 생활을 했다면, 녹턴에 좀 더 매진할 수 있었다면 그의 음악은 어떻게 발전했을까?
무엇이 그의 삶을 망쳐놓았을까? 사실 존 필드의 스승 클레멘티는 그를 한껏 극찬하고는 하였지만 실상은 존 필드의 천재성을 상술에 이용한 죄가 있다. 클레멘티가 파리 음악계의 실력가 플레옐Pleyel (참조: 쇼팽 녹턴 1번 편) 에게 출간할 곡들을 소개하면서 보낸 1801년 12월 9일자 편지를 보면 클레멘티가 존 필드의 천재성에 얼마나 매료되어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매우 가치 있는 작품들로 클레멘티, 두섹Dussek, 비오티Viotti, 크래머Cramer 의 것들이고 특히 존 필드의 새로운 작품 8곡이 들어있네. 그는 나 클레멘티의 제자로, 전도 유망한 천재일세. 이미 여기서는 작곡가로서 연주자로서 큰 명성을 얻었고, 자네도 파리에서 그를 곧 보게 될 걸세.”
물론 존 필드는 파리의 콘서트 홀에서 파리를 뒤흔드는 연주를 하게 되지만 실상 그의 스승 클레멘티는 자신의 작품을 알리고 심지어는 앞 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이 제작하는 피아노를 판매하는데 존 필드를 이용하였다.
한창 작곡과 연주에 매진해야 할 시기에 스승에게 이용 당하는 상황을 젊은 천재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결국 러시아에 남아 혼자 힘으로 대성한 존 필드는 부와 명예가 넘쳐서였을까? 술독에 빠지고 앞서 언급했듯이 재기를 위한 유럽 순회 중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러시아로 돌아와 로열 모스크바 병원에서 55세에 쓸쓸히 눈을 감는다.
John Field’s Nocturne No.2 in C-minor 도입부
특히 존 필드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평을 받기도 하는 녹턴 2번 Eb-major, Op.9 no.2 은 느린 속도andante 로 끊어질 듯 드라마틱하게 이어지는 계속되는 반음chromaticism 들이 시적인 멜로디를 만들어내면서 듣는 이의 심장을 오그라들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요부가 교태를 부리듯 간드러진 오른손 솔로 카덴차cadenza 는 이 곡의 매력의 극치를 이룬다. 그렇다고 이 곡이 가볍거나 연약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쇼팽 특유의 우수 깊은 감성이 시작부터 끝까지 균형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Chopin’s Nocturne in Eb-major Cadenza
마리 까미유 모크Marie Camille Moke (1811-1875)
마리 모크는 이혼 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벌여 1839년 리스트와 비엔나에서 함께 공연하여 갈채를 받았고, 라이프찌히에서는 멘델스죤Mendelssohn과도 공연하였다. 1846~1855년 사이에는 런던에 네 차례나 방문하는 등 영국, 러시아, 프랑스에서 두루 성공을 거두었고 리스트와는 한번 더 공연을 갖기도 하였다.
1855년 파리 콘서트에서는 성악하는 딸과 함께 공연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듬해 딸이 급작스럽게 사망한 후에는 연주를 거의 하지 않다가 1872년 교수직에서 퇴임하고 1875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별세하였다. 이혼 후 그녀의 활동과 명성을 고려할 때 그녀에 대한 세간의 인신공격은 그녀의 미모와 얽혀 여성이라는 당시의 핸디캡으로 인한 사교계의 시기와 질투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시의 비평은 차치하고라도 베를리오즈가 그의 자서전에서 마리 모크에 대해 회상하기를 베를리오즈 그 자신 역시 매혹되었던 “흔들리는 양초의 불꽃 fickle flame of the candle” 으로 그녀를 비유한 것으로 보아 마리 모크는 끊임없이 이성을 유혹하는 마력을 타고났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강제로 사랑하는 애인과 파혼시키고 느닷없이 45세의 부유한 사업가와 결혼시켜 신혼 1년을 좀 넘긴 22세의 매력적인 피아니스트 마리 모크는 부유한 피아노 제작자 남편이 후원하는 비엔나에서 파리로 온지 얼마 안 되는 1833년 당시 23세의 천재 피아니스트 청년 쇼팽을 어떻게 바라 보았을까?
이 창백하고도 내성적이며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천재 청년 음악가를 그녀는 아마도 남편과의 인연으로 자주 보았을 것이고, 또 리스트와의 친분으로도 자주 보지 않았겠는가?
쇼팽 입장에서는 어떠하였을까? 베를리오즈와의 과거를 모를 리가 없었을 터이며, 당대의 명성 있는 피아니스트로서 또 사교계의 질시의 대상이 될 정도로 뛰어난 미모로 뭇 남성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알렉상드르 듀마와 빅토 위고 같은 문인들과도 친분이 있을 정도로 네트워킹이 좋은 사교계의 꽃, 그녀를 당시 파리에서의 정착과 성공에 목이 말랐을 쇼팽은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쇼팽으로서는 그녀에게 자신의 첫 녹턴을 헌정하는 자체가 이미 사회적 의미를 가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무엇이 있었을까? 다음 주에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Yundi Li 연주
– 2014. 3. 김민영
☞ 본 기사는 딱TV (www.ddaktv.com) 에 3월 4일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