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클래식] 쇼팽 : 녹턴 2번…명곡에 담긴 천재의 사랑

딱TV 김민영 한국무역협회 전문위원 2014.03.05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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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cturne No.2 in Eb-major, Op.9 no.2

편집자주 [김민영의 딱클래식 - 피아노 치는 글로벌 마케팅 전문가, 한국무역협회 전문위원 김민영이 딱 찍어 초대하는 클래식 음악]

쇼팽을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아무에게나 쇼팽 하면 떠오르는 곡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가장 많이 언급되는 곡이 바로 이 곡일 것이다. 어쩌면 이 명곡은 인류 역사상 가장 사랑 받는 클래식 베스트 100곡에 충분히 선곡되고도 남을 것이다. 쇼팽의 누이동생 이자벨라 Izabela 는 1834년 바르샤바에서 파리의 쇼팽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곡을 매일 같이 기쁜 마음으로 치고 있다고 고백한다.

왼손 반주가 같은 틀 안에서 조금씩 변형되며 곡 내내 반복되고 오른손 연주가 자유롭게 펼쳐지는 등, 곡의 구조가 녹턴nocturne의 전형이다. 이 곡은 녹턴 형식의 창시자인 아일랜드 출신의 피아니스트 존 필드John Field (1782-1837) 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곡이라는 평을 받는다. 쇼팽이 1830년대 초반 파리에서 활동할 때 사람들은 쇼팽이 존 필드의 제자일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두 사람의 음악은 유사한 면이 많다.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위치한 존 필드 부조상아일랜드의 더블린에 위치한 존 필드 부조상


존 필드는 오르간 연주자였던 할아버지와 바이올리니스트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고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피아노 신동으로 유명했다. 영국으로 넘어가 무치오 클레멘티Muzio Clementi (1752–1832) 의 총애를 받는 제자가 되어 클레멘티와 함께 유럽 순회 공연 활동 중 클레멘티와 헤어져 홀로 러시아에 남아 정착하게 된다. 이후 모스크바와 생 뻬테르부르크를 오가며 명성을 쌓았으나 술에 빠져 세간의 조롱거리가 되고 만다. 재기를 위해 다시 유럽 순회를 떠난 존 필드는 병세가 악화되어 나폴리의 한 병원에 몸 보존을 하고 침상에 눕는 처지로 전락하는데 병원에서 존 필드를 알아본 러시아 귀족에 의해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와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비운의 음악가이다.

[딱클래식] 쇼팽 : 녹턴 2번…명곡에 담긴 천재의 사랑
존 필드는 1792년 더블린에서 열 살의 나이에 데뷔할 정도로 음악 신동이었다. 그가 런던에서 교습 받은 당대의 음악가 클레멘티는 피아노를 눈곱만큼이라도 배운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다 아는, 그리고 어린이 피아노 콩쿠르 대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소나티네의 작곡가로 무수히 많은 소나티네를 남긴 대가이다.



무엇보다 클레멘티는 모짜르트와 피아노 실력을 겨룬 일화가 유명하다. 1781년 비엔나 궁에서 황제 죠셉2세 앞에서 25세의 천재 모짜르트와 29세의 대가 클레멘티는 피아노 연주 실력을 겨루게 되고, 황제는 무승부를 선언하였지만 모짜르트는 클레멘티가 감성 없는 기능공 같으며 이태리 사람들이 그렇듯 사기군 같다고 깎아 내렸다. 반면 클레멘티는 모짜르트의 연주에 탐복하고 일찍이 그토록 영감 가득하고 우아한 연주는 들어본 적이 없다며 모짜르트를 극찬한다.

그로부터 10년 후 1791년 모짜르트는 비엔나에서 초연한 그의 서곡 에서 클레멘티의 소나타 Bb major Op. 24, No.2 의 도입 부분을 사용하여 클레멘티에 대한 경의의 마음을 표한다.

다시 존 필드로 돌아오자. 1799년 런던에서 17세 천재 소년 존 필드는 그의 첫 번째 피아노 협주곡 초연을 갖는다. 그의 연주실력은 하디든Haydn 의 극찬을 받을 정도로 완벽하였다. 1802년 존 필드는 파리와 비엔나를 거쳐 클레멘티와 함께 러시아의 생 뻬테르부르크에서 공연을 했는데 생 뻬테르부르크에 매료된 존 필드는 돌아가지 않고 1805년 모스크바에 정착한다.


이 대목은 당시 생 뻬테르부르크가 유럽 중심 도시의 한 곳으로서 예술의 장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스승과 오랜 공연을 해온 전도유망한 천재가 비엔나나 파리가 아닌 동토의 땅에 홀로 남겠다며 스승과 결별한 배경은 무엇일까? 상술에 밝은 클레멘티가 제자마저도 그의 상술에 이용하는 것에 신물이 나서 내린 결단이 아니었을까 싶다. 클레멘티는 생 뻬테르부르크에 자신의 피아노 쇼룸을 만들어 놓고 존 필드를 피아노 판매원으로 부려먹기까지 했던 것이다.

러시아에 정착한 존 필드는 1810년 프랑스 배우 아델레이드 페르체로Adelaide Percherou 와 결혼, 모스크바와 생 뻬테르부르크를 오가며 29년간 활동하며 명성을 더해간다. 그러나 성공의 정점에 선 그는 자기관리에 실패한다. 나태하고 괴팍한 보헤미안의 생활을 하며 술독에 빠지게 되고 결국 사람들로부터 “술 취한 존” 이라는 손가락질을 받는 수모를 겪는다. 그와 함께 공연을 하기도 했던 부인 아델레이드는 결혼한지 5년 후 아들 에이드리언을 낳자마자 존 필드의 곁을 떠나버린다.

암에 걸린 존 필드는 1831년 치료를 위해 파리로 돌아온 후, 유럽 순회에 나서는데 병세가 악화되어 1834년 나폴리의 한 병원에서 여러 차례 수술을 받으면서 수개월 동안 입원하게 된다. 러시아의 귀족 라흐마노프Rakhmanovs 가족이 병상의 그를 발견하고 1835년 모스크바로 데리고 돌아왔으나 존 필드는 그로부터 16개월 후 모스크바에서 쓸쓸히 고독했던 생애를 마감한다.

존 필드의 녹턴 18곡은 모두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로 가득하다. 그 가운데서도 필자는 특히 2번 C단조 녹턴을 좋아하는데, 슬라브 풍의 색깔이 다소 묻어있는 것만 빼면 과연 쇼팽의 곡이라고 하여도 모를 정도로 그 멜란콜리한 서정성이 그야말로 쇼팽스럽다.

이쯤 되면 녹턴의 오리지널이 뒤바뀐 듯하여 존 필드의 쓸쓸한 말년과 함께 인생이란 참 얄궂다는 생각이 든다. 천재로 태어나 세상의 정상에 올랐다가 바닥까지 내려와 자신의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 를 남에게 내어주고 역사 속으로 쓸쓸히 사라진 존 필드, 그가 러시아에 정착하지 않고 파리나 런던으로 돌아왔다면, 아니 러시아에서 술독에 빠지지 않았다면, 평탄한 결혼 생활을 했다면, 녹턴에 좀 더 매진할 수 있었다면 그의 음악은 어떻게 발전했을까?

무엇이 그의 삶을 망쳐놓았을까? 사실 존 필드의 스승 클레멘티는 그를 한껏 극찬하고는 하였지만 실상은 존 필드의 천재성을 상술에 이용한 죄가 있다. 클레멘티가 파리 음악계의 실력가 플레옐Pleyel (참조: 쇼팽 녹턴 1번 편) 에게 출간할 곡들을 소개하면서 보낸 1801년 12월 9일자 편지를 보면 클레멘티가 존 필드의 천재성에 얼마나 매료되어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매우 가치 있는 작품들로 클레멘티, 두섹Dussek, 비오티Viotti, 크래머Cramer 의 것들이고 특히 존 필드의 새로운 작품 8곡이 들어있네. 그는 나 클레멘티의 제자로, 전도 유망한 천재일세. 이미 여기서는 작곡가로서 연주자로서 큰 명성을 얻었고, 자네도 파리에서 그를 곧 보게 될 걸세.”

물론 존 필드는 파리의 콘서트 홀에서 파리를 뒤흔드는 연주를 하게 되지만 실상 그의 스승 클레멘티는 자신의 작품을 알리고 심지어는 앞 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이 제작하는 피아노를 판매하는데 존 필드를 이용하였다.

한창 작곡과 연주에 매진해야 할 시기에 스승에게 이용 당하는 상황을 젊은 천재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결국 러시아에 남아 혼자 힘으로 대성한 존 필드는 부와 명예가 넘쳐서였을까? 술독에 빠지고 앞서 언급했듯이 재기를 위한 유럽 순회 중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러시아로 돌아와 로열 모스크바 병원에서 55세에 쓸쓸히 눈을 감는다.

John Field’s Nocturne No.2 in C-minor 도입부John Field’s Nocturne No.2 in C-minor 도입부
존 필드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쇼팽이 그만의 녹턴으로 우뚝 선 것은 형식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쇼팽 특유의 구슬프면서도 아름다운 감성이 곡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존 필드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평을 받기도 하는 녹턴 2번 Eb-major, Op.9 no.2 은 느린 속도andante 로 끊어질 듯 드라마틱하게 이어지는 계속되는 반음chromaticism 들이 시적인 멜로디를 만들어내면서 듣는 이의 심장을 오그라들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요부가 교태를 부리듯 간드러진 오른손 솔로 카덴차cadenza 는 이 곡의 매력의 극치를 이룬다. 그렇다고 이 곡이 가볍거나 연약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쇼팽 특유의 우수 깊은 감성이 시작부터 끝까지 균형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Chopin’s Nocturne in Eb-major CadenzaChopin’s Nocturne in Eb-major Cadenza
시공을 초월하여 널리 사랑 받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 명곡은 쇼팽이 1830에 작곡을 시작하여 1831년 봄에 완료, 이듬해 1832년에 출간되었다. 이 곡은 앞장에서 살펴본 1번 녹턴 Bb-minor (Larghetto), 그리고 다음 장에서 다룰 3번 녹턴 B-major (Allegretto) 와 함께 역시 앞서 언급하였던 마리 까미유 모크Marie Camille Moke (1811-1875)에게 헌정된 작품번호 9번으로 묶인 세 곡 가운데 한 곡이다.

마리 까미유 모크Marie Camille Moke (1811-1875)마리 까미유 모크Marie Camille Moke (1811-1875)
이쯤에서 마리 까미유 모크Marie Camille Moke 에게 쇼팽이 이토록 아름다운 그의 생애 첫 녹턴 Op.9 세 곡을 헌정하게 된 배경이 다시 한번 궁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앞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리 모크는 당대 리스트Liszt 에 비견될만한 유명 여성 피아니스트이자, 쇼팽을 후원한 피아노 제작자이자 발행인이고 콘서트 홀을 운영한 플레옐Pleyel의 23세 연하 부인이며, 결혼 몇 달 전만하여도 환상교향곡의 작곡자인 당대의 음악가 베를리오즈Berlioz 의 약혼자이기도 하지 않았는가! 또한 베를리오즈는 쇼팽의 친구인 리스트Liszt 와 절친한 사이였으며, 마리 모크는 앞 편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알렉상드르 듀마Alexandre Dumas, 빅토르 위고Victor Hugo 와 같은 당대의 문인들과도 친분이 있었고, 사교계에서 천박한 색녀로까지 일컬어지는 등 시기와 질투를 받았을 정도로 피아니스트로서의 실력뿐 아니라 상당한 미모를 갖춘 여성이었으니 말이다.

마리 모크는 이혼 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벌여 1839년 리스트와 비엔나에서 함께 공연하여 갈채를 받았고, 라이프찌히에서는 멘델스죤Mendelssohn과도 공연하였다. 1846~1855년 사이에는 런던에 네 차례나 방문하는 등 영국, 러시아, 프랑스에서 두루 성공을 거두었고 리스트와는 한번 더 공연을 갖기도 하였다.

1855년 파리 콘서트에서는 성악하는 딸과 함께 공연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듬해 딸이 급작스럽게 사망한 후에는 연주를 거의 하지 않다가 1872년 교수직에서 퇴임하고 1875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별세하였다. 이혼 후 그녀의 활동과 명성을 고려할 때 그녀에 대한 세간의 인신공격은 그녀의 미모와 얽혀 여성이라는 당시의 핸디캡으로 인한 사교계의 시기와 질투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시의 비평은 차치하고라도 베를리오즈가 그의 자서전에서 마리 모크에 대해 회상하기를 베를리오즈 그 자신 역시 매혹되었던 “흔들리는 양초의 불꽃 fickle flame of the candle” 으로 그녀를 비유한 것으로 보아 마리 모크는 끊임없이 이성을 유혹하는 마력을 타고났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강제로 사랑하는 애인과 파혼시키고 느닷없이 45세의 부유한 사업가와 결혼시켜 신혼 1년을 좀 넘긴 22세의 매력적인 피아니스트 마리 모크는 부유한 피아노 제작자 남편이 후원하는 비엔나에서 파리로 온지 얼마 안 되는 1833년 당시 23세의 천재 피아니스트 청년 쇼팽을 어떻게 바라 보았을까?

이 창백하고도 내성적이며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천재 청년 음악가를 그녀는 아마도 남편과의 인연으로 자주 보았을 것이고, 또 리스트와의 친분으로도 자주 보지 않았겠는가?
쇼팽 입장에서는 어떠하였을까? 베를리오즈와의 과거를 모를 리가 없었을 터이며, 당대의 명성 있는 피아니스트로서 또 사교계의 질시의 대상이 될 정도로 뛰어난 미모로 뭇 남성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알렉상드르 듀마와 빅토 위고 같은 문인들과도 친분이 있을 정도로 네트워킹이 좋은 사교계의 꽃, 그녀를 당시 파리에서의 정착과 성공에 목이 말랐을 쇼팽은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쇼팽으로서는 그녀에게 자신의 첫 녹턴을 헌정하는 자체가 이미 사회적 의미를 가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무엇이 있었을까? 다음 주에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Yundi Li 연주

– 2014. 3. 김민영

☞ 본 기사는 딱TV (www.ddaktv.com) 에 3월 4일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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