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선의 유럽여행기]차가 없는 도시 베네치아

머니투데이 김홍선 2014.02.26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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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자동차 대신 배를 선택···문명의 이기도 인간의 삶을 전제로 수용돼야

편집자주 필자는 23년간 IT 분야에서 엔지니어로, 벤처 기업가로, 전문경영인으로서 종사한 IT 전문가다. '누가 미래를 가질 것인가?'라는 저서도 출간했다. 그는 최근 7년간 몸 담았던 안랩의 CEO를 그만 두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인생의 2막을 준비하면서 그는 최근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여행이야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고, 또 전문가들의 여행기도 많다. IT 경영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여행의 단상은 어떨까. 바쁜 일상으로 출장 외에 여유있는 여행을 꿈꿀 수 없는 CEO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쯤으로 시리즈를 연재한다. 여행경로는 로마에서 시작해 나폴리-피렌체-베니스-밀라노-파리까지. 20일간의 여정이다.

소치 동계 올림픽 막바지. 뉴스에서 우리나라의 메달 획득 현황이 나오고 있는데, 아나운서의 설명이 귀에 확 들어왔다.

“그런데, 우리 메달은 모두 여자 선수들이 딴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여자 선수들의 비중이 크다는 것은 어림짐작하고 있었지만, 그 정도인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러면서, 드디어 남자 선수들도 첫 메달을 확보했다고 앵커가 흥분한다.



스피드 스케이팅 추월 경기. 한국 남자의 유일한 메달 종목. 나는 늦은 시간 결승전 생중계를 지켜보았다. 처음 몇 트랙은 엎치락뒤치락 했건만, 결국 올림픽 신기록까지 세운 오렌지 군단의 승리였다. 모두 메달리스트인 네덜란드 선수들을 어떻게 당하겠는가? 그래도, 내 눈에는 앳되어 보이는 우리 선수들이 대견스러워서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유난히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네덜란드의 독주가 눈에 띄었다. 네덜란드가 강한 이유 중의 하나로 스케이트를 타는 곳이 풍부하다는 천혜적 환경이 지적된다. 지금은 겨울이 짧아졌다지만 과거엔 집 밖으로만 나가면 주위의 물이 모두 얼어서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나라다.



네덜란드 /사진=김홍선네덜란드 /사진=김홍선


몇 년 전 네덜란드에 출장 갔을 때 파트너사 CEO가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다. 집은 아담했다. 인상적인 것은 멋진 배를 가지고 있었고, 문만 열고 나가면 바로 배를 타고 나갈 수 있었다. 실제로 그 배로 도시까지 한 바퀴 다녀왔다. 슈퍼도 가고, 식당도 가고, 도중에 산책하고 있는 자기 친구와도 인사를 했다. 운하의 나라다운 이국적인 풍경과 더불어 배로 돌아다니는 이들의 생활이 피부에 와 닿았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

이탈리아 여행 전 가장 궁금했던 곳이 물의 도시 베네치아였다. 영상으로는 보았지만, 그곳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잘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피렌체에서 기차를 타고 베네치아를 향해 다가가고 있는데, 갑자기 큰 호수가 나타났다. 뿌연 안갯속을 달리면서 “참 호수가 크다”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다. 그것은 바다였다.


베네치아 풍경 사진=김홍선베네치아 풍경 사진=김홍선
종착점인 산타 루치아 역은 여느 다른 역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역을 나서자 뭔가 이상했다. 보통 택시가 줄 서 있거나 버스 정류장이 눈에 뜨이기 마련인데, 전혀 보이지 않는다. 조심스레 몇 미터 정도 더 걸어나가니 큰 배가 도착하면서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소위 수상버스로 불리는 바포레토(Vaporetto)가 바삐 오가고 있다. 전혀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이다.

역 근처 호텔을 미리 예약해 두었는데, 한두 사람이 비좁게 지나다닐 수 있는 골목길로 5분가량 걸어 들어가야 했다. 그래도 300년이 넘은 호텔이란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3층까지 무거운 짐을 들고 올라가면서 그 말이 실감이 갔다. 짐을 풀고 나서 호텔 밖으로 나와서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문득 “이 호텔에는 차를 어떻게 대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짐도 나르고 손님이 오가려면 적어도 차가 오가야 하지 않는가?

리알토 다리 /사진=김홍선리알토 다리 /사진=김홍선
그 궁금증은 수상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풀렸다. 베네치아에는 차가 없다. 모든 운송 수단이 배다. 버스, 택시, 경찰차, 응급차, 편의점 등. 심지어는 유명한 택배 회사도 자신의 로고가 박힌 배가 있다. 다음날 다소 떨어진 도시 쪽에 가 보니 차가 보였지만, 그곳은 산업체가 모인 곳이었다. 적어도 주요 도시와 근처 유명 섬들에는 차가 전혀 없다. 어느 주소이든 배로 접근할 수 있다. 이것이 섬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베네치아의 풍경이다.

차가 없는 삶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베네치아에서는 차가 없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선입관 탓이 크다. 자동차가 보급된 게 언제던가? ‘총, 균, 쇠’에 의하면 제1차 세계대전 전만 해도 말이나 철도에 대한 만족도가 워낙 높아서, 당시 사람들이 자동차로 바꾸어야 할 필요를 못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자동차 없는 문명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가? 문명의 이기란 일종의 중독성이 동반되는가 보다.

스스로 정체성에 기반을 둔 문명

영국에서 지하철을 탔을 때 많은 사람이 책을 읽고 있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물론 종이책이 많았고, 일부는 전자책을 읽고 있었다. 우리나라처럼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보는 경우와는 대조적이었다. 혹자는 영국 지하철에서는 Wi-Fi가 안 터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인터넷이 되면 그 사람들이 책 대신 스마트폰을 볼까?

탄식의 다리 /사진=김홍선탄식의 다리 /사진=김홍선
영국에서 언론 인터뷰를 하는데, 컴퓨터를 가지고 오는 기자를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종이 수첩을 펴서 직접 필기를 했다. 오히려 적는 시간보다 내 눈을 빤히 보면서 대화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심지어 BBC 라디오에서는 80년대에나 보았던 아날로그 녹음기를 메고 커다란 방망이 마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노트북을 열고 키보드 두드리느라 바쁜 한국의 기자회견과는 다른 풍경이다.

문명의 이기는 우리의 생활 문화와 관련이 있다. 필요로 새로운 발명이 이루어지고 대중화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우선이다. 자신에게 맞지도 않는 물건을, 단지 동향이라고 해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베네치아도 자동차의 유익함을 왜 몰랐겠는가? 그러나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인프라로 바꾸려면 기존의 살던 방식을 부수고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유용한 서비스와 상품을 업그레이드된 배의 인프라로 바꾸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현대 문명의 요소는 빠짐없이 있다. 몇백 년을 이어온 생활 인프라에 현대 문명을 접목하니, 오히려 호기심과 신기함을 가져다주는 유명 여행지가 되었다.

기술보다 인간적인 삶이 먼저다. 인터넷이 안 되는 300년 된 호텔 로비에서, 첨단 문명의 소용돌이에서 잠시 떨어져 보는 휴식. 베네치아 같은 도시에서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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